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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환의 생활경제칼럼

유동환의 생활경제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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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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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6-17
미합중국의 건국 국부들(26)-제임스 매디슨(3)

 

(지난 호에 이어)

이 전쟁 중에 매디슨은 1812년 대통령선거에서 재선되었다. 제퍼슨의 국무장관 재직시 군축감소정책으로 군사력을 약화시킨 매디슨은 상원에 연방군 재정비를 부탁하고 군비를 위하여 자신이 극진하게 반대했던 중앙은행의 필요성을 느껴 1816년 미연방중앙은행을 재활했다.

전비를 위해 발행한 국채 이자 지불을 위해 제퍼슨과 자신이 없애버렸던 세금을 부활시켰다. 다행히 앤드류 잭슨같은 명장들이 육해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영국국민들도 전쟁에 지쳤고 나폴레온이 멸망하고 프랑스에 대한 제재가 불필요하게 되어 양국은 1817년 12월 24일 벨지움 겐트에서 겐트조약(GHENT TREATY)을 맺고 전쟁을 끝냈다.

1812미영전쟁으로 양국은 영토소득이 없었고 영국과 함께 싸운 인디언들만 그들만의 국가건립 소망을 저버리게 되었다.

 

인디언 정책

워싱턴의 인디언 동화정책과 인디언 부족 소유의 토지를 매입하는 제퍼슨 정책을 따라 매디슨은 인디언추장들로부터 토지매입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토지소 유욕과 동화정책에 대한 저항 때문에 미국은 1891년 강제로 원주민 자녀들을 부모로부터 분리시켜 기독교교단이 운영하는 인디언기숙사에서 미국식 교육과 영어를 가르쳤다. 성폭행, 강간, 매질과 영양실조로 희생되는 학생들은 육체적, 정신적 학대로 인한 고통을 호소했다.

참고로 캐나다는 맥도널드 초대수상에 의해 1879년부터 1978년까지 미국보다 앞서 인디언 강제기숙사를 운영하며 학대한 기록을 갖고 있다.

기숙사에서 탈출한 증인들은 어린 여학생들이 강간을 방지하기 위해 점호시간이 끝나면 모두가 같은 침대로 모여서 자야 했고 원주민어를 사용하면 양잿물로 양치질을 하는 벌을 받았다고 진술하여 국내인들의 치를 떨게 한다.

CBC는 2021년 5월27일 215명의 미명어린이들의 유해가 구교교단이 운영하는 BC주 캠루프스기숙사 소유지에서 발굴되었다는 경악적인 뉴스를 실었다.

기록공개를 거부하는 교단에 미온적으로 대응하는 트루도 수상의 정책에 반해 12명 이상의 국내 변호사들은 UN 인권위원회에 수사를 요청하고 있다. 수사의 귀추는 물론 15만명 중 얼마나 많은 희생자가 발굴될지 전세계의 관심사가 되고 있다.

 

 은퇴와 사망(1917-1836)

1817년 대통령임기가 끝난 후 65세의 매디슨은 먼틀리에 담배농장으로 돌아와 농장을 운영했다. 의붓아들에게 맡겼던 농장은 관리능력 부족으로 운영손실을 거듭 냈고 연초가격 하락으로 매디슨은 재정적 파탄을 겪고 가난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매디슨은 틈틈이 잭슨을 비롯한 재임대통령의 정책을 조언했다. 1826년 제퍼슨 사망 후 10년간 버지니아대 총장을 맡았고, 1836년 6월28일 8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모교인 프린스턴대와 버지니아대 그리고 미 식민지협회에 많은 유산을 남겼지만 부인 돌리(DOLLEY MADISON 1768-1849)에게는 3만 달러의 유산만 남겨 부인은 1849년 7월12일 사망 전까지 궁핍한 여생을 보냈다.

1794년 9월 15일 버의 소개로 매디슨과 결혼한 돌리는 남편의 내성적인 성격과 정반대로 활동적이고 가장 사교적인 미 대통령 영부인으로 알려졌다. 그들은 매디슨가 묘지에 안장되었다.

묘지에는 미 헌법의 아버지라고 새겨진 동판이 미합중국의 마지막 건국국부를 상기시키고 있다.

 

 

donyoo
유동환
88711
63052
2021-06-10
미합중국의 건국 국부들 (25)-제임스 매디슨(2)

 

(지난 호에 이어)

 

당의 분쟁

 1890년 이후 무소속인 워싱턴의 내각은 남부 농산지역을 대표하는 친프랑스계 제퍼슨과 매디슨의 민주공화당과 북부 상공업지역을 대표하는 친영파 해밀턴과 애덤스 제이의 연방당으로 나뉘어지고 두 당은 심한 정치적 갈등을 일으켰다. 특히 해밀턴의 중앙은행 설립을 극구 반대하는 제퍼슨과 매디슨을 포함한 민주공화당원들에게 워싱턴은 반대를 위한 반대보다 국가이익을 위한 건설적인 분쟁을 종용했다.

 1793년 제퍼슨이 워싱턴 내각을 사임하게되어 매디슨은 민주공화당 당수직을 맡았다.

 

국무장관(1801- 1809)

 매디슨은 제퍼슨 내각의 국무장관직을 맡아 제퍼슨의 정책을 완수하며 워싱턴의 고별사 지침을 따라 영국과 프랑스간 전쟁에서 중립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농업을 중시하는 민주공화당 정책에 따라 향후 미시시피강 서부지역의 넓은 토지가 필요할 것이라는 제퍼슨의 지시를 따라 1803년 매디슨은 루이지애너 토지구입을 목적으로 제임스 먼로를 프랑스 특사로 보내 라버트 리빙스턴 주프랑스대사와 함께 나폴레온과 토지구매 흥정을 성공시키게 도와 주었다.

 

미국무장관(1801-1809)

토마스 제퍼슨 제3대통령 재임시 8년간 국무장관직을 맡았던 매디슨은 제퍼슨의 오른팔 역할을 하였다. 가장 큰 업적은 나폴레온 전쟁을 이용하여 영국과 프랑스의 사이를 갈라놓고 어부지리를 얻는 것이었다. 또한 루이지애너로 알려진 미시시피 서쪽지역을 프랑스나 영국이 차지할 경우 미국은 피바람 부는 전쟁에 말려들 수밖에 없다는 분석을 하였다.

라버트 리빙스턴 프랑스주재 대사관을 보강하기 위해 제임스 먼로를 특사로 보내 나폴레온과 직접 매매흥정을 성공적으로 이끌게 도와주었다. 매디슨은 국가의 이익을 위한 상업적인 결정은 위헌의 대상이 될 수 없다고 했다.

 

미 4대 대통령(1809 –1917)

1808년 11월 미 대통령 선거에서 매디슨은 122개의 선거인단 표를 얻어 47개의 챨스 핑크니 연방당 후보를 가볍게 누르고 승리를 거두었다.

1809년 3월 4일 취임식을 마친 매디슨은 초당정책으로 각 지역의 정치인들을 골고루 선택하여 내각을 편성했다. 국무장관에 알버트 캘러튼을 선출했으나 상원의 반대로 라버트 스미스를 택해야 했다.

매디슨은 무능한 스미스 국무장관을 2년 만에 제임스 먼로와 교체했다. 매디슨의 탕평책은 연방당 계통의 내각은 물론 민주공화당 내각으로부터도 지지를 받지 못하여 논쟁을 피하는 매디슨은 주로 갤러튼 재무장관과 정책을 세웠다.

 

1812년 미영전쟁

나폴레온 전쟁으로 미국은 프랑스와 영국 간의 교역을 지렛대로 어부지리를 얻으려고 했으나 도리어 양대 강국으로부터 협공을 받게 되었다. 미국이 프랑스로 향하는 미 상선을 영국으로부터 보호한다면 영국으로 향하는 미 상선을 공격하지 않겠다는 나폴레온의 제의를 받고 영국을 설득하려 했으나 영국은 계속 미 상선을 나포하여 울분에 찬 국민은 영국과 전쟁을 해야 한다는 중론에 휩쓸렸다.

헨리 클레이와 잔 캘훈은 상원을 설득하여 매디슨으로 하여금 1812년 6월1일 영국에 선전포고를 하게하여 1812년 미영전쟁을 일으켰다. 매디슨은 영국의 통치를 받는 캐나다지역을 공격하였다.

온타리오 지역산물을 퀘벡지역으로 운송하지 못하게 하여 영국의 공급망을 차단시키려는 의도였지만 캐나다의용군들은 영국정규군 및 인디언과 힘을 합하여 미군을 계속 격파시켰다. (다음 호에 계속)

 

 

 

donyoo
유동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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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052
2021-05-27
미 합중국의 건국 국부들(24)

 

제임스 매디슨(1)

 

권력남용은 물론 자유남용은 국민의 자유를 침해한다. (제임스 매디슨)

 


제임스 매디슨

 

 미합중국 헌법의 아버지로 불리는 제임스 매디슨은 미4대 대통령 임기중 영국에 선전포고를 하여 제2의 미 독립전쟁이라고도 알려진 1812년 미영전쟁을 일으켰다.

 

 성장교육

 제임스 매디슨은 1751년 3월 16일 버지니아주 포트 칸웨이에서 담배농장주 부친 제임스 매디슨 시니어와 담배도매상 가문의 모친 넬리 칸웨이 사이의 부유한 가정에서 12자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2형제중 성인까지 생존한 형제는 6명에 불과했다. 당시 유아의 높은 사망율로 평균수명은 36세 밖에 안되었다.

 1760년 매디슨 가족은 같은 주 먼틀리에로 이주했다. 개인 수업으로 라버슨 초등교육과 마튼 목사의 고등교육을 마친 매디슨은 1769년 19세 나이로 뉴저지 칼리지(현 프린스턴대 )의 3년 대학 과정을 2년에 마치고 졸업했다. 대학교육중 매디슨은 어메리칸 위그 소사이어티에 가입하여 연설과 논쟁을 연마하며 정치철학에 큰 관심을 두었다. 졸업 후 고향으로 돌아와 동생들의 개인교육을 맡았다.

 1774년 영국 식민지 정책 반대위원회에 가입하고 1775년 부친이 지휘하는 주 민병대의 부관으로 미 독립항쟁에 가담했지만 신체가 허약하여 실전을 경험하지 못했다. 정치에 입문하여 1777년부터 2년간 버지니아주 대표로 미 연합상원으로 활약했다. 메디슨은 미 독립전쟁 군비를 연합상원이 각 주로부터 세금으로 충당해야 된다고 주장했지만 13주 대표들은 정관에 의해 동의할 수 없다고 하여 정관을 수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784년 버지니아주 의원이 되어 제퍼슨을 도와 영국 성공회를 벗어나 개신교를 믿을 수 있는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였다.

 

 미 헌법의 아버지

 1786년 애너폴리스 회의에서 해밀턴을 만난 매디슨은 정관수정의 필요성에 서로 동의하고 매디슨은 미 연합상원에 재복귀했다.

 해밀턴과 함께 프랭클린 워싱턴을 포함한 원로대표나 일부 주 대표상원들의 동의를 얻은 후 정관수정보다 연방체제를 강화하는 헌법의 필요성을 각 주 대표들에게 알리기 위해 1787년 5월25일 필라델피아 회의를 소집하였다. 지병으로 고생하는 프랭클린 대신 워싱턴을 의장으로 선출하고 매디슨은 200회 이상의 연설로 삼권분립에 의한 연방정부 체제 중심의 헌법초안을 제의했으나 13주 대표들 일부는 연합정관을 고수하고 대부분은 찬성을 하지 않고 주저하였다.

 

 헌법의 필요성을 알리기 위해 해밀턴과 제이가 시작한85회에 걸친 연방지침서논문(THE FEDERALIST PAPERS )중 매디슨은 29회에 걸친 논문을 제출하여 미 전역에 알렸다. 매디슨이 1천번째 집필한 지침서 10회에서 각 주정부 사이의 분쟁을 방지하기 위한 연방정부의 중앙통제 필요성을 강조했다.

 지침서 51회에서 매디슨은 중앙정부의 3권분립 체제가 서로 세력균형을 이루고 견제할 수 있게 하였고 연방정부와 주정부의 주종관계 역할을 명시했다. 이 지침서 영향력으로 1788년 6월 2일 헌법초안은13개주 중 8 주가 찬성을 하였으나 한표 차이로 통과를 못시켰다. 동년 6월25일 매디슨의 마지막 연설로 뉴욕주의 승인을 받아 워싱턴 헌법 설립의장은 미 연방헌법을 공포했다.

 

 인권헌장(BILL OF RIGHTS)

 1789년 당선된 워싱턴 초대 대통령은 매디슨이 상원의원이 되기를 원했다. 헌법에 의해 연방정부와 주정부의 권리가 남용되면 미 국민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다고 해석하는 반연방주의자 패트릭 헨리의 정치공세로 매디슨은 버지니아주 정치권에서 배제되어 상원이 될 수 없었다.

 헨리를 동조하는 정치인들이 개헌을 추진하려는기미를 보이자 매디슨은 워싱턴의 지시를 받고 1789년 6월 8일 10개항의 수정헌법을 만들어 국민의 표현의 자유, 종교의 자유, 합법적인 집회의 자유, 출판의 자유, 총기소유의 자유 외에 국민들이 정부의 권력남용으로부터 보호받게 하여 민심을 수습할 수 있었고 상원의원직에 당선되었다.

 인권헌장을 집필하며 매디슨은 ‘ 자유의 남용으로 폭동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했다. 232년이 지난 2021년 환상과 현실을 거짓으로 다리놓는 트럼프의 술책을 따라 폭도들이 워싱턴 미 의사당을 점거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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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환
88044
63052
2021-05-13
미합중국의 건국 국부들(23)-잔 제이(2)

 

대법원장(Chief Justice, 1789-1795)

1789년9월 워싱턴 미연방초대대통령은 외무장관직을 맡던 제이를 국무장관에 임명하려 했으나 제이는 사양했다. 워싱턴은 대신 대법원장직을 맡아달라고 부탁을 했고 제이는 흔쾌히 받아들여 10월 19일 미 초대 연방대법원장으로 임명되었다.

워싱턴은 제이 대법원장을 포함하여 6명의 대법관을 임명하였다. 일명 제이 코트(Jay Court)라고도 알려진 초대연방대법원은 제이 임직시 4건의 소송 판결을 처리했다.

그 중 1793년 소송에서 독립전쟁시 왕당파였던 치슴은 조오지아주정부가 자신의 재산을 몰수하는 조오지아주 판결소송을 연방대법원에 상소했다. 제이를 중심으로 연방대법원은 치슴의 손을 들어주었다.

조오지아주는 수정헌법 11조에 의해 개인은 주정부의 판결을 연방법원에 상소를 할 수 없다고 해석하였으나 제이는 연방사법부의 결정에 따라야 한다고 번복을 재강조했다. 즉 법의절대성에 의한 판결보다 소송의 공정성을 참작하는 연방사법부의 판례를 남겼다.

법보다 공정성이 더 중요하다는 제이의 판결은 2021년 2월 미연방 대법원이 트럼프 전 대통령 탈세 및 사기혐의수사에 필요한 서류를 뉴욕주 검찰총장에게 넘겨야 된다는 판결로 재 강조되었다.

현재 9명의 대법관 중 6명을 공화당 대통령들이 임명했다. 줄리아니의 진술에 따라 트럼프의 죄목이 들어나면 형사재판의 판결을 받을 것으로 해석된다.

 

제이 조약(Jay Treaty, 1794-1795)

1783년 파리조약대로 미국의 북쪽 항구와 5대 호수를 포함한 서북지역을 떠나지 않고 장악하고 있었던 영국은1793년과 1794년 영국이나 유럽을 향하는 미국수출을 방해하였다.

최악으로 군수물자를 싣고 프랑스로 향하는 300척 이상의 미국상선을 나포하여 선원들을 포로로 만들어 프랑스 해군과 해전을 벌dl게 했다. 이에 맞서 메디슨과 제퍼슨을 중심으로 하는 민주공화당은 영국과 무역전쟁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에 미 독립전쟁시 미국을 도와주었던 루이 16세가 프랑스대혁명으로 처형당한 사실을 알게 된 해밀턴은 막강한 해군력을 가진 영국과 강화조약을 맺어야만 미국이 경제부국이 될 수 있고 훗날 영국과 대적할 수 있는 국방력을 키울 수 있다는 분석을 하였다.

따라서 해밀턴과 아담스 및 제이를 포함한 연방당은 친영정책을 고수했다. 무소속인 워싱턴은 연방당의 정책을 채택하여 해밀턴으로 하여금 강화조약내용을 만들어 제이에게 넘겨주고 제이를 영국행 특사로 임명했다.

1794년 11월 19일 제이는 영국런던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의 제이조약에 서명하였다.

1. 영국은 30척의 미상선 나포보상금 1,165만달러를 미국에게 지불하고 미국은 1775년 이전 영국에 진 빚 60만 파운드를 갚는다.

2. 영국은 5대 호수와 샴플레인 호수에 설치한 8개의 영국요새를 철수한다.

3. 미-영은 상호간 최우선 무역국으로 대우한다.

4. 미국은 영국의 반불무역정책에 동의한다.

5. 미국은 영국이 관할하는 케리비언 섬들과 제한적인 무역을 한다.

6. 미국이나 캐나다 원주민은 미국과 캐나다 국경의 제한을 받지 않고 이주할 수 있다.

다음과 같은 제이의 요청은 영국이 받아드리지 않았다.

1. 영국의 미국상선 나포중지.

2. 영국이 풀어준 흑인노예들에 대한 변상.

위 강화조약을 접한 제퍼슨을 포함한 민주공화당은 제이를 반역자로 몰고 미 국민들을 동요시켜 밤낮으로 곳곳에서 제이의 모의 화형식을 거행했다. 워싱턴은 1795년 6월2일 미 상원을 설득하여 20대 10으로 제이조약을 통과시켜 1796년 2월 29일 제이조약실효에 들어갔다.

칼자루를 든 영국과의 굴욕적인 제이조약으로 후에 미국이 전세계 패권국이 될 수 있었다.

참고로 1964년 한국에서도 박정희의 한일 협정은 굴욕적인 외교라고 국민의 울분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 협정이 한강의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초석이 되었다는 사실을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뉴욕주지사(1795-1801)

제이조약으로 인기가 하락된 제이는 1796년 대통령 선거에서 패했다. 그는 1795년 대법원장직을 사임하고 1801년까지 뉴욕주지사로 정치생활을 계속했다.

 

은퇴와 사망(1801-1929)

1801년 정계에서 은퇴한 제이는 뉴욕주 웨스트체스터에서 농사를 지었다. 불행하게도 1803년 5월 8일 45세의 부인 세라 리빙스턴 제이(1757-1802)가 사망했다.

1774년 제이와 결혼한 부유가정출신의 세라 제이 부인은 그들 사이에서 난 6자녀뿐만 아니라 제이의 눈이 먼 두 형제와 정신질환으로 고생하는 형제를 거의 혼자 돌봐야 하는 정신적 재정적 스트레스가 조기사망의 한 원인으로 해석된다.

1829년 5월4일 제이는 84세의 나이에 중풍으로 별세했다. 그의 유언대로 시신은 부인과 함께 뉴욕주 라이 제이 에스테이트에 안장되었다.

성격이 조용한 제이는 워싱턴이 인정한 미 역사상 최고의 영웅적 외교가로 인정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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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환
877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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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29
미합중국의 건국 국부들(22)-잔 제이(1)

 

 

 

국익을 위한 전쟁은 국가존립을 위한 필요악이다. (잔 제이)

 

잔 제이는 미 독립 후 미국을 호시탐탐 노리는 영국의 재 침략을 방지할 수 있었던 능란한 외교가로 알려졌다. 전쟁을 피하기 위한 외교협상이 영국과의 저자세외교로 오판되어 인기 하락을 초래하게 되어 제2대 미 대통령 선거에 낙선되었지만 잔 제이는 벤자민 프랭클린과 마찬가지로 대통령직을 지내지 않은 미합중국의 건국 국부로 추대 받고 있다.

 

 

성장교육

제이는 1745년 12월 12일 무역상 부호로 알려진 프랑스계의 부친 피터 제이와 홀랜드계 모친 메어리 밴 코틀란드의 10자녀들 중 7번째로 뉴욕시에서 태어났다. 생후 3개월 후에 제이 가족은 뉴욕주 라이농장으로 이주했다.

8세까지 모친으로부터 가정교육을 받고 3년간 교회학교과정을 마치고 계속 가정교육을 거처 14세에 킹스칼리지(현 컬럼비아대)를 입학했다. 1764년 우등생으로 졸업한 후 4년간 연수를 끝내고, 1769년 변호사 자격증을 획득하여 1771년 변호사 사무실을 차렸다.

제이는 한때 미국과 영국이 공존하는 체제를 제창했으나 1774년 이후 “미신대륙 정착인들의 재산권은 영국의 부당한 세금착취로부터 보호를 받아야 한다”라고 주장하며, 미 독립운동의 전초가 되는 13주 지하조직의 요직을 맡으며 정치에 입문하였다.

 

미 연합상원 6대 대통령(1778-1779)

제이는 1776년 미 독립선언을 지원하고 뉴욕주 대표로 미연합 상원의원직을 맡으며 1777년 뉴욕주 헌법을 초안했고, 뉴욕주 지방법원판사직을 맡았다.

1778년 제이는 13주 미연상원을 대표하는 6대 대통령에 피선되었다.

미 연합상원은 연합정관에 의해 미 연합상원의장이 행정직까지 맡아 대통령이라 불렀고, 임기는 1년으로 1774년부터 1789년 미합중국이 건국되어 워싱턴 초대대통령이 취임하기 전까지 14명의 미연합 대통령이 취임되었다.

미연합상원은 외교, 군사, 경제 등을 관할했지만 미연합 대통령은 상원의원들의 다수의견을 따르는 것 외에는 권한이 전혀 주어지지 않았다. 미연합 정관은 미연합 상원이 13주로부터 세금을 부과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미독립전쟁 비용을 위해 지폐를 발행해도 지폐가치를 받혀줄 수 있는 재정력이 없어 인플레로 가치가 떨어져 독립군봉급지불을 포함한 군 보급에 만성적인 차질을 일으켰다.

따라서 제이는 각주에 세금을 부과하고 상업을 관장할 수 있는 중앙연방제도의 필요성을 강조하게 되었다.

 

유럽외교활동(1779 – 1783)

1779년 가을 제이는 재정적인 지원을 받기 위해 스페인 전권대사로 임명되었다. 미 독립전쟁이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스페인 정부는 제이를 만나주질 않았다. 끈질긴 지원요청 끝에 영국이 요크타운 전쟁에 패했다는 소식이 유럽에 퍼지면서 1782년 스페인으로부터 17만 달러의 차관을 기대할 수 있었다.

 1782년 여름 제이는 벤자민 프랭클린이 주도하는 미국과 영국간의 파리평화조약을 지원하기 위해 파리에 도착했다. 프랑스는 미국과 동맹국으로 참관했다. 회의진행 중 프랭클린은 제이의 제의를 받아들여 잔 애덤스, 헨리 로렌스, 윌리엄 프랭클린의 동의를 받고 미국은 프랑스를 제치고 비밀리에 영국과 합의를 한 후 프랑스를 설득하여 평화조약을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제이는 영국대표단의 협력으로 로드 쉘번 영국수상과 직접담판을 하여 미 독립을 위한 평화조약을 약속 받을 수 있었다. 조건은 미국과 프랑스의 동맹관계를 중립으로 유지하고 미국은 영국과 무역을 통한 평화적인 유대관계를 유지하자는 계획이었다.

제이가 성공적으로 영국과 담판을 끝낸 후 프랭클린은 노련한 외교로 프랑스를 설득하여 1783년 9월 3일 미국, 영국, 프랑스는 미 독립을 인정하는 파리조약에 서명하였다. 애덤스는 영국과 담판을 성공시킨 제이의 능력을 칭송하였다.

 

페더럴리스트 페이퍼 (1788)

영국으로부터 독립이 되었지만 미 연합정관에 의한 미 연합은 중앙체제의 결핍으로 유럽강국의 재 침략을 방위할 국력을 키울 수가 없었다. 제이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알렉산더 해밀턴과 합류하여 제임스 메디슨과 함께 중앙연방제도를 도입하는 85편의 논문(The Federalist Papers)을 퍼블리우스 제목으로 1787년 10월부터 1788년4월까지 뉴욕주인디펜던트저널지에 연속 게재하여 미 연방헌법의 기초를 닦았다.

제이는 2편부터 5편까지 집필을 통하여 중앙 연방체제로 국방력을 강화하여 영국이나 프랑스의 재 침략을 방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국가간에 이익을 위한 전쟁은 불가피하다고 주장했다.

제이는 관절염으로 계속 집필을 못하고 64편에 “미 연방상원의 3분의 2의 다수결로 상원이 미 대통령의 행정권을 번복할 수 있어야 된다”는 논문을 한번 더 게재하여 미 연방이 부서간 서로 견제할 수 있는 체제를 도입하게 하였다. (다음 호에 계속)

 

 

 

donyoo
유동환
87517
63052
2021-04-15
미합중국의 건국 국부들(21)-토마스 제퍼슨(3)

 

 묘비명에 새긴 업적(1826 )

 편지로 오랜 친분을 맺었던 제퍼슨과 애덤스는 1826년 7월 4일 미독립 50주년기념일에 몇시간 차이로 세상을 달리했다. 신생 미합중국을 이끌어가며  상대방의 정책을 끊임없이 신랄하게 반대했던   그들은 14년간 가장 친밀한 우정을 쌓으며 정치철학을 논하고 서로를 존경하였다.

 제퍼슨은 그의 사망날짜를 미 독립 40주년까지 기다리며 7월 4일 오후 1시반 76세로 세상을 달리하며 마지막 한말은 “ 오늘이 독립기념일인가 “ 라는 애국심의 집착이었다. 몇시간후 애덤스가 오후 5시 90세의 생을 마감하며 마지막 한 말은 “ 제퍼슨은 살아있나“라는 질문이었다. 본인은 없어도 같이 독립선언서를 작성한 제퍼슨이라도 살기를 원한 애국심의 다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본부인  말싸  웨일스 스켈튼(1748-1782)과 1772년 결혼한지 10년만에  부인을 잃은  제퍼슨은 44년간 독신으로 살면서 부인의 머리카락을 목거리 장신구에 간직하고 있었다. 말싸의 조기사망은 원래  당뇨로 약질인 체구에 10년간  자녀를 여섯이나 낳아 지병이 악화된 이유였다.  

 제퍼슨의 시신은 부인과 같은 먼티첼로 제퍼슨 가족묘지에 안장되었다. 그의묘비에는 그의 유언대로  ‘ 독립선언서의 저자, 버지니아주민을 위한  종교의 자유 선구자, 버지니아주립대학 설립자 토마스 제퍼슨’이라고 새겼다.

 

제퍼슨 최대의 유산 루이지애너 토지(1826 )

 제퍼슨은 사망시 10만 달러의  큰 개인 빚을 가족에게 남겼다. 그러나 미국 국민들에게는 미국의 국토를 두배로 늘리는 유산을 남겼다.  

 

루이지애너 매입(Louisiana Purchase 1803)

 케블리에  프랑스 탐험가는 1682년 미시시피강 남부 뉴올리언스 항구를 기점으로  거대한 북쪽 지역을 식민지화하여 루이 14세의 이름을 따서 루이지에너로 명명하고 미 남부지역의 무역항구로 프랑스의 경제발전을 이르키는데  공헌하였다. 프랑스와 영국간에 벌어진 미 신대륙 점령전쟁에서 불리하게 된 프랑스는 1763년 루이지에너지역을 스페인에게 양보하고 인도점령을 위한  7년 전쟁으로 전장을 옮겨야 했다.

 

 

 

 1800년 프랑스 나폴레온은 스페인 왕궁과  비밀리에 루이지에너 지역을 프랑스로  환수하는  조약을 맺고 하이티에서 설탕과 커피를 생산하여 뉴올리언스 항구를 통해 미 신대륙에 수출하는 사업을 계획했다. 그러나 하이티 반란군과 황열병으로 무참히 패한 나폴레온군은 유럽에서 영국과의 전쟁에 총력을 기울여야 했다.

 이 사실을 분석 연구한 제퍼슨은  프랑스나 영국의 재침략을 우려하여 1802년 먼로와 리빙스턴을 프랑스에 보내 친불정책을 강조하며 나폴레온과 루이지에너 지역 매입을 흥정하는  정책을 도모했다.

 1803년 초 그들은 10만 평방킬로미터의 뉴올리언스 근접 북쪽지역을 1천만 달러에 오퍼를 냈다.  전쟁 군비가 절박한 나폴레온은 동년 4월 북쪽 캐나다 일부까지 포함하여 214만 4,500 평방킬로미터(한반도약10배 )의 광대한 토지를 1,500만 달러에 카운터 오퍼를 냈다.

 제퍼슨은 7월3일 카운터 오퍼 소식을 받은 후 연방당의 반대를 무릅쓰고 10월 20일  미 연방상원을 설득하여 24대 7 표결로 나폴레온의 카운터 오퍼를 받아들였다.

 미국 토지만큼 큰 토지를 구입하려면  헌법을 고쳐야 한다는 탁상공론자들에게 침략전쟁이 아닌 정상적인 상업은 위헌이 아니라고 일축하고 영국과의 분란을 일으킬 수 있다는 연방당에게는 영불 두 나라와 전쟁을 하는 것 보다는 영국 한 나라와 전쟁하는 것이 미국에 유리할 수 있다고 응수했다.

 11월 30일 프랑스는 스페인으로 부터 루이지에너 지역을 환수하는 계약을 끝냈고 12월 20일 뉴올리언스에서 미국은 프랑스로부터 매입계약을 마감했다. 실제로 나폴레온은  급하게  1,125만 달러를 받고 375만 달러를 덜 받았다. 이 토지는 529,911,680 에이커로 1에커당 2.1센트의 가격이었다.   

 제퍼슨은 등록된 토지를 구입한 것이 아니고 미개척지에 거주하는 아메리칸 인디안 부족들과 흥정을 하든지 무력으로 그들을 몰아내고 서부개척을 할 수 있는 권리를 구입한 것이었다. 즉  타유럽제국들의 신대륙 침공을 제어하는 계약이었다.

 제퍼슨의 루이지에너 매입은 유럽에서 이민온 정착민들에게 노력해서 얻은 토지소유권을 가질 수 있는 민주경제를 활성화시켰다. 서부개척은 신이 내린 우리의 운명(Manifest Destiny)이라는 개척정신을 일으켜 루이지에너 매입 45년 후 미 합중국은 1848년 캘리포니아를 접수하게 되었고   현재 세계를 이끌어나갈 수 있는 경제력을 키우게 하였다.

 제퍼슨은 워싱턴의 독립 과업을 방대한 토지매입으로 계승했다고 볼 수 있다.

 

 

 

donyoo
유동환
87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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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3-18
미합중국의 건국 국부들-토마스 제퍼슨(2)

 

미 2대 부통령(1797-1801)

1796년 대통령선거후보로 출마한 제퍼슨은 68의 선거인단투표수로 71을 받은 애덤스에게 패하고 부통령이 되었다. 해밀턴의 영향을 받는 워싱턴 전대통령의 각료들을 경질하지 않고 내각을 형성한 애덤스의 정책을 제퍼슨은 직접적으로 반대하지 못하고 민주공화당 상원들과 함께 애덤스의 정책을 논쟁으로 끌고 나갔다. 아니면 프랑스 미 주재원을 이용하여 애덤스의 정책을 방해하고 프랑스로 하여금 영국과 전쟁을 유도하려 했으나 모든 것이 실패로 돌아갔다.

애덤스의 국가반역보안법을 반대하기 위해 제퍼슨은 메디슨과 함께 주정부는 주민의 권리나 자유를 위한다면 연방정책을 받아드리지 않아도 된다는 켄터키 버지니아해결책자를 익명으로 발간하여 켄터키와 버지니아주로 하여금 분리정신을 일으켜 후에 남북전쟁의 불씨가 되었다. 제퍼슨은 개인적으로 워싱턴을 존경한다고 했지만 워싱턴의 장례식에는 참석하지 않았다.

 

미3대 대통령(1801-1809)

1800년 대통령선거에서 제퍼슨은 버와같이 73의 선거인단표를 얻어 동점이 되었다. 해밀턴의 영향을 받은 미연방하원은 제퍼슨을 대통령으로 버를 부통령으로 투표했다.

1801년 3월 4일 호화스러운 마차행렬대신 제퍼슨은 혼자 평복차림으로 말을 타고 취임식장에 도착한 후 말의 재갈을 손수 마구간에 걸었다.

첫 번 취임식에서 그는 “우리 모든 미 국민은 표현의 자유와 권리를 평등하게 소유하고 있는 연방당원이고 민주공화당원이다”라고 강조하여 미 국민의 단결을 호소했다. 그는 해밀턴의 영향을 받은 예산을 취소하고 위스키 과세를 폐지하고 여러가지 세금을 줄이거나 폐지했다.

1780년대까지 미국 상선은 지중해 해적들로부터 영국의 보호를 받았다. 미합중국 독립 후 바바리해적단들에게 텃세를 내며 미국 상선을 보호받아야 했다. 1802년 제퍼슨은 애덤스가 창설한 막강한 해군력으로 대서양을 건너 바바리 해적단을 토벌하고 지중해뿐만 아니라 유럽에 미국의 막강한 해군력을 과시했다.

그 후 해군을 비롯한 국방비와 인프라비용을 줄여 연방정부의 지출을 삭감시켰다. 반면에 1802년 웨스트포인트 육군사관학교를 세워 후세에 미국의 국방력을 키우는 인재양성을 가능하게 하였다.

그는 긴축정책으로 임기8년간 8천3백만 달러의 연방적자를 5천7백만 달러로 줄일 수 있었다. 세금을 삭감하고 국가경비를 줄이는 정책은 170여 년이 지난 현재에도 공화당이 고수하고 있다.

또한 애덤스가 제정한 국가보안 반역법을 개인 표현의 자유를 침해했다고 폐지했다. 그러나 극구 반대했던 해밀턴의 중앙은행제도는 국가도산을 피하기 위해 울며 겨자 먹기로 유지해야 했다.

제퍼슨은 1803년 7월3일 프랑스 나폴레온으로부터 루이지애나 지역을 매입했다. 이로 인해 국토를 두 배로 늘린 공적을 인정받아 제퍼슨은 1804년 대통령 재임선거에서 선거인단 162의 표를 얻어 4표를 얻은 경쟁자 핑크니를 압도하고 재임하게 되었다.

그런데 첫 번째 임기 중 제퍼슨 정책을 반대하는 버 부통령은 부통령직을 사임했다. 그리고 1804년 사이가 좋지 않았던 해밀턴과 권총격투에서 해밀턴을 총격 살해한 후 살인죄로 몰려 도주하던 버는 위킬슨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멕시코 땅을 도모하려다 체포되어 해밀턴 살인죄로 재판에 회부되었다.

결국 버는 무죄로 석방되었다. 이사건 해결을 위해 제퍼슨은 많은 시간을 소비하고 정신적인 고통을 받았다.

1807년 제퍼슨은 플로리다 서부지역을 2백만 달러에 매입하려다 실패했다. 또한 동년 영국과 외교관계가 악화되어 영국과 통상금지령을 내렸고 이로 인해 경제가 침체되어 국민으로부터 인기를 잃게 되었고 결국 이 정책은 1812년 영미간의 전쟁으로 이어졌다.

농업을 중심으로 경제를 일으키려는 제퍼슨의 농경정책은 중앙은행과 제조업 융성 없이 국가경제가 성장할 수 없다는 사실이 후세에게 알려지며 세계100대 부호들이 미국에서 꿈틀거리게 되었다.

 

은퇴(1809 -1926)

1809년 제퍼슨은 3선을 포기하고 고향 버지니아주 먼티첼로로 돌아갔다. 그는 교회에 소속되지 않는 대학교를 건립하기 위해 버지니아주대학 설립 계획을 세우고 1819년 직접 건축설계를 마친 후 건축비조달을 위해 1820년 버지니아주의회 보증으로 세 차례에 걸쳐 18만 달러를 융자받아 1822년 건축을 완공하고 5만 달러 가치의 대학도서관을 세운 뒤 1825년 버지니아대학의 첫 개강을 가능하게 했다.

한편 1800년 이후 정적인 애덤스와 교류가 없었던 제퍼슨은 1812년 애덤스의 부인 애비게일의 중재로 친분을 맺기 시작하여 14년간 가장 친한 펜팔친구가 되었다. 재직 중 정적이라도 은퇴를 한 전직대통령들은 친화될 수 있다는 본보기를 남겼고, 20세기말 전직대통령들은 단결의 상징인 프레지던트 클럽을 만들었다.

그러나 미국의 민주주의 선거를 파괴하려고 노력하는 트럼프는 자신은 원치도 않겠지만 프레지던트 클럽 멤버들이 트럼프가 원해도 그를 클럽에 포함시킬지는 두고 보아야 할 일이다. (다음 호에 계속)

 

 

 

donyoo
유동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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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2-18
미합중국의 건국 국부들(20)-토마스 제퍼슨(1)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 (토마스 제퍼슨)

 

토마스 제퍼슨

 

 

토마스 제퍼슨은 정치인, 정치철학자, 변호사, 농장주인 등으로 알려졌고 버지니아대학을 설립했다. 또한 미 독립선언서 본문을 작성했고, 민주공화당을 창당했다. 그리고 미국의 영토를 두 배로 늘린 미 3대 대통령이었다.

 

성장교육

제퍼슨은 1743년 4월13일 버지니아주 쉐드웰 농장에서 피터 제퍼슨과 제인 랜덜프 부모의 10자녀 중 3번째인 첫아들로 태어났다. 14세에 5000 에이커와 175명의 흑인노예 농장주였던 부친을 잃고 1759년 16세에 버지니아주 윌리엄스에 소재한 윌리엄 앤드 메어리대학에서 수학 및 철학을 전공하며 잔 로크, 프란시스 베이컨, 아이삭 뉴톤의 이론을 공부했다.

틈틈이 가보로 내려온 200여권의 책을 탐독하여 문장력을 키웠다. 졸업 후 조오지 위드 변호사사무실에서 연수를 받고, 1767년 변호사 자격증을 받았다. 1769년부터 1774년까지 버지니아주 농장대의원직을 맡았고, 1774년엔 “영국의회는 미 식민지에 통치권한이 없다”는 팜플렛을 발간했다. 1775년 미 독립전쟁이 시작되면서 제퍼슨은 미 연합상원의 버지니아 대표가 되었다.

 

독립선언문

제퍼슨은 미 연합상원 초년생이었지만 그의 특출한 문장력으로 잔 애덤스, 라저 셔만, 라버트 리빙스턴과 함께 5인의 독립선언문 편찬위원이 되었다. 그들이 경험이 풍부한 애덤스를 초안작성자로 선출했을 때 애덤스는 독립선언서 머리말을 쓰고 본문은 제퍼슨에게 부탁을 하였다.

제퍼슨이 작성한 독립선언서는 잔 로크와 잔 밀튼 사상에 기초를 두어 “인간은 자유롭게 살 권리와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자유가 있고 신에 의해 평등하게 태어났으며 이 권리와 자유를 지켜야 하는 의무가 있다”는 내용을 독립선언서에 강조하여 미 독립전쟁을 이끌어가는 조오지 워싱턴 미 연합총사령관을 비롯하여 수하의 장성들과 민병대의 열광적인 애국정신을 불러일으켰다.

이후 제퍼슨은 “모든 인간은 동등하게 태어났다(All Men are created equal)”라는 유명한 문구의 창시자로 알려졌다. 이 독립선언서는 1776년 7월 4일 미 연합상원에서 목숨을 건 56명의 13주 대표들이 서명하고 공포되었다,

참고로 그 당시 흑인은 물론 백인이라도 토지를 소유하지 않은 남자들은 선거권이 주어지지 않았고, 여자들은 재산을 소유할 권리가 없었다. 따라서 남편이 사망하면 아들이 소유권을 갖고 아들이 없으면 재산 관리만 할 수 있고 소유주가 될 수 없었기 때문에 소송을 받거나 걸 권리도 없었다.

따라서 미 독립선언서는 미 식민지 개척자들 중 대표적인 부유층 중심으로 만들어졌다. 미 독립선언서를 받은 조오지 3세 영국왕은 온통 자기를 비방하는 치욕적인 선언문을 읽고 분개하여 영국군에게 총공격을 명령하고 영국은 미 연합의 흑인노예 정책으로 신음하는 흑인들을 징집하여 미 독립군에게 총부리를 가하게 했다. 이 소식을 접한 많은 수의 흑인노예들이 캐나다로 도주하여 영국군에 가담했다. 그리고 그 후예들이 캐나다 시민이 되었다.

 

미 초대 국무장관(1789 – 1793)

미 독립선언 후 제퍼슨은 버지니아 주의원직을 맞고 1779년부터 2년간 버지니아 주지사가 되어 종교의 자유를 버지니아주 법안으로 만들었다. 이 법안은 후에 미 헌법수정안1조의 근간이 되었다. 제퍼슨은1784년 프랑스 파리에서 애담스와 함께 프랭클린을 보좌하여 파리조약을 맺고 유럽각국을 다니며 외교활동을 하고 1789년 미국으로 돌아와 워싱턴 초대대통령 내각의 초대 국무장관직을 맡았다.

제퍼슨은 해밀턴의 경제정책을 극구 반대하여 분쟁이 끝이지 않았다. 이로 인해 1791년 해밀턴과 애덤스는 잔제이와 함께 연방당을 만들었고 다음해 제퍼슨은 제임스 메디슨과 제임스 먼로와 함께 민주공화당을 창당했다.

중앙 연방체제를 강화하여 13개 주의 재정과 방위를 통제하고 이를 위해 세금과 통화팽창으로 공업생산경제개발을 일으켜 국력을 키우는 해밀턴의 연방당정책에 반해 중앙연방체제를 축소시켜 국가경비와 세금을 줄이고 농업으로 주정부의 성장에 초점을 두자는 제퍼슨의 민주공화당은 결국 무소속인 워싱턴 대통령이 간접적으로 해밀턴의 손을 들어주는 정책으로 이어갔다.

1812년 연방당은 당내파벌로 해산되었고, 민주공화당은 1825년 위그당으로 변천했다가 1850년경 해밀턴의 정책을 따르는 민주당과 제퍼슨의 정책을 추종하는 공화당으로 나누어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170여 년이 지난 2021년 2월 11일 로이터 통신은 미 역사상 최악의 전직대통령 트럼프를 따라가야 하는 공화당으로부터 탈피하려는 정통파 공화당 주요 인물 12명 정도가 제3 창당을 위해120여명의 공화당원들과 줌 미팅을 진행 중이라고 전했다. (다음 호에 계속)

 

 

 

donyoo
유동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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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052
2021-01-07
미합중국의 건국 국부들(19)-잔 애덤스(2)

 

미 초대 부통령(1789-1797)

1789년 2월4일 미합중국 초대 대통령선거에서 각주를 대표하는 69명 선거인단의 69표를 얻은 조오지 워싱턴은 초대 대통령에, 34표를 얻은 애덤 스미스는 초대부통령에 당선되었다. 선거인단은 2개의 투표권으로 2명의 후보자를 선출할 수 있었다. 득표 순서대로 대통령과 부통령이 선출되었다.

부통령에 선출된 애덤스는 상원의장직을 겸임했다. 워싱턴의 재선에 따라 애덤스는 8년간 부통령직을 재임하며 워싱턴의 지시 하에 해밀턴이 주도하는 미 행정부의 정책을 지지하며 해밀턴과 연방당을 만들었다.

한때 애덤스는 민주공화당을 세운 제퍼슨의 의견을 따라 해밀턴의 연방은행 정책을 비난했다가 해밀턴의 적이 되었다.

 

미2대 대통령(1797-1801)

1796년 12월 7일 거행된 미 합중국2대 대통령선거에 각주를 대표하는 138명의 선거인단은 276개의 투표행사를 통해 애덤스는 71표를 얻어 대통령에, 제퍼슨은 68표로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애덤스는 해밀턴을 중심으로 움직여지는 워싱턴의 내각을 개편하지 않고 1797년 3월4일 취임식을 거행했다. 임기가 시작되면서 미국은 프랑스와 영국과의 전쟁으로 인한 정치적 외교에 휘말리게 되었다. 문제는 1795년 영국과의 전쟁을 피하기 위해 맺은 제이 조약을 트집잡고 미국의 상선을 공격하는 프랑스와의 외교정책 실패였다.

제퍼슨을 대통령에 당선시키기 위한 프랑스의 내정간섭에 대한 보복으로 애덤스는 미 상하원에서 미국은 프랑스와 전쟁준비를 해야 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한편으로 4인방의 프랑스사절단을 프랑스에 보냈으나 프랑스가 그들의 화친조약을 받아줄리가 없었다. 이로 인해 애덤스는 1798년부터 1800년까지 해군력을 증강시키고 프랑스군이 본토를 침략한다는 가상 하에 프랑스와 선전포고 없이 가상전쟁에 들어갔다.

총사령관은 은퇴중인 워싱턴에게 위임하고 해밀턴을 부사령관으로 임명했다. 또한 이민법을 강화하여 프랑스인들의 입국불허와 스파이 추방정책을 고수하고 이러한 정책을 비판하는 표현의 자유를 금지하는 법을 만들어 민주공화당을 지지하는 국민들의 빗발치는 반대여론을 일으켰다.

1798년 이집트 나일강전투에서 영연합국에게 패한 프랑스는 1800년 미국과 화친조약을 맺어 프랑스와 가상전쟁은 끝을 맺게 되었다. 후에 애덤스는 세계를 주름잡는 미 해군의 아버지로 알려졌다. 막대한 전쟁준비로 인한 국채탕감을 위해 최고 1%의 재산세를 국민에게 부과하여 1789년 잔 프라이스는 재산세반대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은 해밀턴이 이끄는 군대로 무혈제압 되었고 주모자들은 반역죄로 교수형의 판결을 받았으나 애덤스의 사면으로 풀려났다. 1800년 11월1일 애덤스는 워싱턴DC에 소재한 현재 백악관으로 알려진 대통령관저의 첫 주인이 되었다.

1800년 12월 3일 대통령선거 재선에 도전한 애덤스는 낙선되었다. 연방당 분열로 표가 나누어지고 프랑스와의 외교정책실패와 표현의 자유 제한 그리고 가상전쟁으로 인한 경제침체가 낙선의 요인들이었다.

 

은퇴생활(1801-1826)

낙선의 패배감을 가슴에 간직한 66세의 애덤스는 제퍼슨 미3대 대통령 취임식에 참가하지 않고 보스턴 남쪽외곽 피스필드 농장으로 돌아와 농업에 종사하였다.

항상 검소한 생활로 $13,000의 거액을 저축한 애덤스는 농장을 매입하여 사망시 $10만 달러의 유산을 남길 수 있는 갑부가 되었다. 평생 중요한 결정에 애덤스를 도와준 부인 애비게일과 애덤스는 비싼 임금을 주고 백인노동자들을 고용했다.

그들은 흑인 노예해방운동 선구자로 역사에 알려져 있다. 은퇴 후 정치에 관여하지 않았지만 제퍼슨의 루이지애나 영토구입에는 아들 잔 쿠윈시와 함께 크게 찬성했다.

1812년부터 은퇴한 정적 제퍼슨과 화해를 하고 사망시까지 편지왕래로 절친한 친분을 맺었다. 부인은 1825년 거행된 아들 잔 쿠윈시의 제6대 미 대통령 취임식을 보지 못하고 1818년 장질부사로 세상을 떠났다.

애덤스는 1825년2월 아들의 6대 대통령 당선에 큰 기쁨을 감추지 못했고, 미 독립선언 50주년 되는 1826년 7월 16일 저녁6시 30분에 90세의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시신은 메사추세츠 쿠윈시에 자리잡은 부인의 묘소 곁에 안장되었다.

사망전 제퍼슨의 안부를 전해 받은 애덤스는 같은 날 몇 시간 전에 독립선언서를 같이 작성한 제퍼슨이 사망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두 국부들의 독립기념일 사망은 우연의 일치라기보다 그들에 의한 애국심의 유산이라 할 수 있다.

사망 한달전 애덤스는 ”독립 후 미국의 역사는 대통령의 직권선용과 남용에 좌우된다”고 유언을 남겼다. 그 후190년 만에 미국은 미 역사상 최악의 대통령 직권남용 자 트럼프를 맞아 국내분열과 외톨이 외교정책으로 세계자유경제국가를 이끌어가는 미국의 정경 체제가 잠시 몸살을 앓게 되었다.

미 국민들은 바이든을 비롯하여 건국국부들의 정신유산을 이어받는 차기 대통령들의 국내외 단합정책을 따를 것으로 본다.

 

 

 

donyoo
유동환
847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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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18
미합중국의 건국 국부들(18)-잔 애덤스(1)

 

우리 자손들이 수학과 철학을 배울수 있게, 우리는 전쟁정치와 전략을 배워야 한다. (잔 애덤스)

 

 

▲잔 애덤스

 

잔 애덤스는 변호사, 미 연합 상원의원. 유럽외교 등의 정치 활동을 배경으로 미 부통령, 미 대통령직을 지냈지만 정치가라기보다는 정치철학가로 알려져 있다.

 

공정한 변호와 워싱턴총사령관 임명

잔은 1735년 10월 30일 매서츄세츠주 브레인츄리에서 청교도후예인 아버지 잔과 어머니 수잔의 장남으로 태어나 1755년 하버드대학을 졸업했다. 3년 후 보스톤에서 유능한 변호사로 활동하며 1764년 애비게일 스미스와 결혼했다.

1765년 영국의 인지세에 식민지 정착인들의 반발이 일자 영국은1767년 타운센드법으로 바꾸어 생필품의 수입세를 부과하였다. 애덤스는 정착인들을 위한 애국심을 일으켜 영국식민지정책 반대운동에 나섰다.

1770년 3월 5일 보스턴에서 영국보초병6명에게 돌과 얼음 등을 던지는 250여명의 성난 정착인들에게 총격을 가하여 5명 사살과 6명 중경상을 입힌 영국보초병들은 보스턴 학살 재판을 받아야 했다.

정착인들의 빗발치는 반발을 무릅쓰고 애덤스는 체포된 영국군인들을 변호하여 현장에 없었던 지휘관과 5명의 군인들이 무죄판결을 받게 했고, 발포한 2명의 영국군은 정당방위 살인죄로 감형을 받게했다.

개인이 받을 수 있는 변호는 적대국관계와 무관하다는 판단으로 해결된 이 사건은 현재까지 미국의 공정한 사법재판과정의 귀감이 되었다. 사람을 판단하지 않고 사실을 판단해야 한다는 이성을 후세에 알린 것이다.

1774년 애덤스는 미 연합상원의 매서츄세츠주 대표가 되었고, 1775년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미 연합상원회에서 조오지 워싱턴을 미 독립전쟁 총사령관으로 지명 추천하여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자신은 미 연합상원을 통해 독립군의 전쟁물량을 공급하는 독립정치에 몰두했다.

 

미 독립선언서

13개 주 대표자들 중 잔 애덤스, 토마스 제퍼슨, 벤자민 프랭클린, 라저 셔먼, 라버트 리빙스턴은 1776년 6월부터 미 독립선언서 초안을 작성하여7월 4일 최종 선언서로 채택하고 미 연합상원에서 56명의 지역대표들이 서명하게 하였다. 미 독립선언서 공포를 주장한 애덤스는 본문 머리말을 쓰고 제퍼슨을 지명 선출하여 미 독립선언서를 작성하게 하였다.

 

유럽외교활동

1777년 가을 미 연합상원의 요청에 의해 애덤스는 프랑스와 동맹외교를 추진 중인 벤자민 프랭클린 보좌관직을 수락했다. 부인 애비게일은 고향에서 가족을 돌보고 애덤스는 후에 미 6대 대통령이 된 10살 난 장남 잔 쿠인시와 함께 1778년 2월 보스턴함을 타고 보스턴 항구를 떠나 풍랑과 영국함대들과 충돌을 피하며 4월 프랑스 파리에 도착했다.

프랭클린은 이미 미국과 프랑스와의 동맹을 마감한 상태였다. 사교하고 거리가 먼 대쪽 같은 성격에 직설적인 애덤스는 프랭클린의 상류사회 부인들과 파티를 즐기며 호화스러운 유흥위주의 외교활동을 이해하지 못하고 불평을 터트렸다.  

미 연합상원이 프랭클린을 전권특사로 임명하고 애덤스의 직책을 부여하지 않자 애덤스는 아들과 함께 1779년 8월 고향으로 돌아왔다가 11월 장남과 9살 난 차남 찰스와 함께 스페인을 통해 파리에 도착하였다. 그는 프랭클린을 도와 찰스 버지언스 프랑스 외부장관에게 직설적으로 프랑스의 원군을 재촉하였다.

버지언스가 미 연합상원 애덤스와 회담을 할 수 없다고 불평하자, 1780년 애덤스는 네덜란드로 떠났다. 네덜란드 각료를 만나려고 했지만 영국의 눈치를 보는 네덜란드 정부는 애덤스의 요청을 수락하지 않았다. 애덤스는 스트레스 병으로 몸져눕기까지 했다. 1781년 11월 워싱턴 미 독립연합군의 승리가 알려지자 네덜란드정부는 애덤스를 미 연합국 대사로 인정하고 회담 끝에 교역과 5백만 길더의 차관을 약속했다.

끈질긴 애국심으로 열매를 맺은 애덤스는 1783년 파리조약회담에 참가했다. 버지언스의 눈에 벗어난 애덤스는 잔 제이와 함께 프랑스와 무관하게 영국과 교역을 하는 조건으로 영국에게 미국 독립을 요구했다. 미국과 프랑스의 연합을 방지하기 위해 영국은 애덤스의 요구를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의 허락 없이 영국과 협약한 사실을 알아내고 화가 난 버지언스는 영국과 미국의 연합이 불가피할 수도 있다는 재치 있는 프랭클린의 설득으로 1783년 9월3일 미국의 자주독립을 인정하는 파리조약에 영국과 함께 서약하였다.

애덤스는 1785년부터 1788년까지 영국주재 미 초대 대사에 임명되어 부인 애비게일과 함께 런던에 거주했다. 그는 제이 미 외무부장관을 대동하고 조오지 3세 영국왕과 양국이 전후 해결해야 될 많은 문제를 논의했다.

대영제국 정치인들이 갖은 패전의 쓰라림을 달래야 하는 어려움이 컸고, 때에 따라서 일부 영국강경파들의 신체적 위협을 피해 애덤스는 부인과 숨어 다니기도 하며 양국간 전쟁 없는 외교관계를 이룩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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