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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환의 생활경제칼럼

유동환의 생활경제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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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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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27
1812년 전쟁 전후 캐나다 역사

 

캐나다 분리 (1791년 12월 26)

영국의회는 캐나다헌법을 만들어 캐나다지역을 헬리팩스, 프린스 에드워드, 뉴브런스윅, 퀘백지역을 하위 캐나다로, 온타리오지역을 상위 캐나다로 나누었다. 30만이 넘는 프랑스계 퀘백주민과 10만도 안 되는 영국계 온타리오 주민의 종교와 언어를 존중하여 나누어진 결정이었다.

 

국경확립 (1814년 12월24일)

겐트조약에 의해 5대호를 중심으로 대서양까지 미국과 캐나다의 국경이 현재와 같이 확정되었다.

 

모반운동 (1837, 1838년)

1827년부터 영국의 통치하에 있는 캐나다 정치구조에 불만을 가진 수정주의자들이 무기를 들고 토론토와 몬트리얼을 점령하여 캐나다를 미국과 같이 공화국으로 만들자는 모반운동을 벌였다.

놀란 영국은 제2의 미국식 독립전쟁을 우려하여 군대를 보내 캐나다 민병들과 원주민과 연합이 되어 수정주의자들을 제압했다. 미국에서 이주한 왕당파들을 추종하는 영국계 정착인들과 조용하게 살고 싶어하는 프랑스계의 퀘백인들의 호응을 받지 못해 모반운동에 실패한 수정주의자들은 일부 교수형에 처해졌고 나머지는 뿔뿔이 도주하여 흩어졌다.

이에 대응하여 캐나다총독인 영국의 잔 램턴 더햄 백작은 1838년 상위 캐나다와 하위 캐나다를 병합한 캐나다를 대표하는 자치통치제제를 도입하여 선거로 지역대표단을 구성하자는 제안을 하여 민주체제를 확립하는 계기를 준비했다.

또한 그는 영어를 중심으로 하는 신교주의 캐나다를 제안하였다. 그러나 퀘벡 주민들은 구교를 지키고 불어사용을 갈구하며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자치책임제 정부수립 (1840년)

1840년 퀘벡의 라포테인, 온타리오의 볼드윈, 노바스코샤의 하우 대표들은 영국총독들과 함께 둘로 나누어진 상하위 캐나다를 하나로 통합하여 캐나다로 명명하고 자치책임 정부수립을 위해 물밑작업을 하여 1847년부터 1848년까지 노바스코샤가 캐나다정부를 관장했고, 다음해 2년간은 영국총독 엘건 백작이 유나이티드 캐나다정부를 통치했다.

의원 다수결로 통치권을 갖게 하는 내각제도는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다. 1849년 불어를 고수하는 민주체제를 확립한 라폰테인은 통합캐나다 초대 의장이 되었다.

 

캐나다 연합국 (1864년-1867년)

1864년부터 3년간 노바스코샤 뉴브런스윅 그리고 퀘벡, 온타리오, 핼리팩스, 프린스에드워드아일랜드의 36인 대표들은 영국정부의 지지를 받으며 영연방 캐나다 신생국을 건립하여 캐나다 건국국부들로 알려지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캐나다정부를 연방정부와 주정부의 상하 두 단계로 나누었다. 연방정부는 연방입법에 의해 도미니언 캐나다가 되었고, 각 주정부는 각각 고유의 입법부를 만들고 현재까지 같은 구조로 통치하고 있다.

영국의회는 영국북미법을 재정 통과하여 1867년 7월1일을 도미니언 캐나다설립국경일로 설정하였다. 도미니언데이는 1982년 7월1일 캐나다데이로 이름을 바꾸었다.

도미니언 캐나다 초대수상은 잔 알렉샌더 맥도널드경이 연방선거를 통해 다수 득표로 피선되었다.

 

도미니언 캐나다의 서부 영토팽창 (1867 – 1999)

1867년 온태리오, 퀘벡, 노바스코샤, 뉴브런스윅

1870년 매니토바, 노스웨스트 테리토리

1871년 브리티쉬 컬럼비아

1873년 프린스에드워드아일랜드

1898년 유컨 테리터리

1905년 알버타, 사스카츄완

1949년 뉴펀드랜드 라브라도

1999년 누나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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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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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20
1812년 전쟁의 유산

 

미국 중앙은행

미 초대 대통령 조오지 워싱턴 정부의 재무장관직을 맡았던 알렉산더 해밀턴의 사설 중앙은행설립은 미국 경제성장에 원동력이 되었다. 독립전쟁 이후 국가의 부채를 갚기 위해 사설 중앙은행이 국채를 발행하고 경제성장으로 세입을 올려 이자와 원금을 갚는 구조를 만들었다.

이는 사업가가 은행융자로 사업을 벌이고 회사 이익금으로 융자금을 갚으며 계속적으로 사업을 벌려 기업성장을 일으키는 것과 같은 원리다.

경제성장의 시작은 남부의 주 농산물인 목화를 재배하여 북부의 면 공정사업으로 제조된 천을 유럽에 수출하는 산업활성화로 가능했다. 이를 지켜본 유럽의 소농작인과 장인들이 신대륙으로 몰려들어 미국은 토마스 패인이 예견한대로 인구증가는 물론 가파른 경제성장을 초래했다.

해밀턴은 잔 애덤스 등과 연방당을 만들어 각주가 연방정부의 중앙은행체제에서 경제활동이 가능하게 만들었다. 이에 토마스 제퍼슨 국무장관은 제임스 매디슨을 포함하여 민주공화당을 만들어 중앙은행제도는 미 국민을 사설은행장들의 재정적인 노예로 만든다고 극구 반대 하였다.

제퍼슨은 미 3대 대통령에 당선되어 중앙은행 제도를 폐지하려고 했지만 중앙은행의 융자 없이는 미국은 재정적인 파산을 초래하기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로 중앙은행을 계속 유지하면서 세입으로 단기간에 국가부채를 갚는 정책을 세웠다.

그러나 미국 제2의 독립전쟁으로 불리는 1812년 전쟁에 필요한 전비를 조달하기 위한 융자금은 중앙은행 체제가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미 정규군을 육성하는 연방방위체제로 각주는 물론 미 개척자들이 호시탐탐 노리는 유럽강대국들의 침략으로부터 자신의 재산 및 생존보호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또한 개척자들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육성된 각주의 민병대는 전비를 위한 연방정부의 재정보증이 필요했고, 때에 따라서 미 연방정규군의 지원이 필요했기 때문에 결국 1812년 전쟁 이후 미국은 중앙은행 금융권으로 경제 및 군사강국을 이룰 수 있었다.

중앙은행 역할은 유럽의 금융권을 장악한 유태계 금융인들이 맡았고, 그들은 융자금을 갚을 수 있는 미국의 경제성장을 담보로 잡고 신대륙에 정착하였다. 즉 자원이 풍부하면 사람들이 모이고 사람들이 모이면 사업가들이 모이고 사업가들이 모이면 은행가들이 모이는 원칙이다.

이들은 생명 자유 사유재산을 자연의 권리로 보는 잔 라크 철학을 반영한 미 헌법의 보장을 받고 미국식 자본주의를 일으켰다.

1812년 전쟁 이후 미국은 원주민들을 희생시키며 서부개척을 계속하여 1850년 캘리포니아를 미주에 병합하게 되었고, 동서남북 광대한 신대륙의 자원과 금융권을 이용하여 19세기 후반 철도, 통신, 석유사업을 일으킨 세계 100대 부호들이 계속 나와 미국을 경제대국으로 만들었다.

현재도 부호들을 계속 산출하며 부호들의 사업능력을 담보로 연방은행은 계속 달러를 찍어내며 세계금융질서를 유지하고 있다.

 

총기소유의 자유

1791년 12월 5일 공표된 미 수정 헌법 2조는 ‘규율을 잘 지키는 민병대는 자유를 추구하는 주의 안보를 위해 무기를 소지하고 휴대할 수 있는 주민의 권리를 침해해서는 안 된다’라고 표기하고 있다.

이 헌법은 1812년 전쟁 중 각주의 개척자들이 손쉽게 무기를 들고 자신들의 재산과 생명을 지키는 민병대를 조성하여 영군과 대적하여 미국이 제2의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끄는데 동참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 헌법에 의해 230년이 지난 현재에도 미 국민의 31%가 총기 소유 및 휴대를 하고 있다. 자동소총은 물론 극소수는 탱크 같은 군사무기도 소유하고 있다. 총기소유의 자유를 악용하는 일부 범죄자들은 정기적으로 총기 대량학살을 내고 있다.

2019년 미국 통계에 의하면 총기로 인한 살인은 15,766명, 자살이 23,941명으로 총 39,707명이 총기남용으로 희생당했다. 2012년 총기로 인한 부상치료에 드는 제반 비용은 자그마치 2290억 달러로 집계되었다.

총기소유법을 수정하려는 민주당은 공화당의 악바리 같은 반대에 속수무책이다. 미국인들의 64%가 총기소유제한을 지지해도 공화당을 지지하는 국민 51%가 반대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샌디 후크 초등학교 대량학살에 대한 기자회견 중 자비심으로 흐르는 오바마 대통령의 눈물에 동요되지 않고 있다.

 

 

 

donyoo
유동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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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13
미국의 캐나다 침략(28)-1812년 전쟁 전후(18)

 

(지난 호에 이어)

겐트 조약(1814년 12월 24일)

1812년 전쟁을 종전해야 하는 이유

1812년 전쟁의 근본적인 이유가 나폴레옹 전쟁으로 영국이 미국과 프랑스의 교역을 방지하기 위해 미국 상선을 해상에서 나포를 자행했기 때문이었다. 나폴레옹의 몰락으로 나포할 이유가 없어지면서 미국은 군사력이 증강되어 영군의 희생이 커져가고 영국은 7년 전쟁 이후 6년간 미 독립전쟁 특히 12년간 나폴레옹 전쟁 중 3년간 미국과 1812년 전쟁을 겪어야 했다.

미국 제2의 독립전쟁이라 불리는 1812년 전쟁이 끝이 안보이자 리버플 백작으로 알려진 라버트 뱅크스 젠킨슨 영국 수상은 웰링턴 장군백작으로 알려진 아서 웰슬리 장군에게 1812년 전쟁의 총사령관직을 의뢰했다.

당시 프랑스의 파리 대사직을 맡던 웰슬리는 영국은 독립한 미 정착민들의 민심을 잡지 못해 유럽과 달리 넓은 황야에서 미 정착민들이 총기를 들고 그들의 재산을 보호하려 하는 전쟁에 이길 수 없으니 양국은 종전조약을 맺고 프랑스 국력이 커질 경우 프랑스와의 전쟁이 불가피해질것을 준비하기 위해 영국은 미국과 교역을 활성화하여 전후 경제부흥에 총력을 기우려야 된다고 조언했다.

오랜 전쟁에 필요한 전비를 위한 세금을 부담하고 젊은 병사들의 희생에 신물이 난 영국민의 원성이 높아지고 이길 수 없는 전쟁을 계속할 수 없어 영국은 종전을 해야 했다.

미 신생국도 전쟁으로 유럽과 교역을 하지 못해 파산직전까지 가게 되어 양국은 1814년 8월9일 현재 벨지움 겐트에서 종전을 위한 겐트조약 담판을 시작했다.

 

담판 외교관

매디슨은 잔 쿠인시 아담을 중심으로 헨리 클레이 제임스 베이야드 시니어 조나슨 러슬 알버트 겔러튼의 담판전문팀을 파견했다. 후에 6대 대통령에 당선된 아담은 어렸을 때부터 부친 잔 아담 미 2대 대통령을 따라 유럽전역에서 교육을 받은 명성이 높은 직업외교가였다. 그는 영 해군제독 출신의 겜비어 남작을 중심으로 하는 영 외교팀과 4개월 이상 걸친 담판을 이끌어나갔다.

 

조약 내용

처음 15개로 시작한 조약항목은 11개로 종결되었다. 조약을 간추리면 양국은 종전을 하고 캐나다와 접경을 중심으로 전쟁 전으로 국토를 환원하는 것이었다. 영국은 원주민에게 총기를 보급하며 미군과 전투를 하게하여 테컴서 추장을 중심으로 영군 및 캐나다군과 연합군을 만들어 1만 여명의 원주민전사가 영국을 도왔다.

연합조건은 5대호 이하 켄터키주 접경까지 차지하는 미 북서부지역을 원주민에게 돌려주고 캐나다와 완충지역을 만드는 것이었다. 아담스의 반발로 이 조항은 삭제되고 미국이 원주민과 직접 협상하는 조항으로 바뀌었다. 말이 협상이지 약탈해도 영국이 도와주지 않는다는 조항이 되었다.

한편 영국은 플로리다 서쪽을 중심으로 제퍼슨 미 3대 대통령이 나폴레옹으로부터 구입한 루이지애너 지역을 스페인과 공동 차지하자는 동맹을 맺었다. 그러나 이 조항은 담판조항에 들어가지도 않았고 미군이 플로리다 서쪽을 떠나지 않아도 된다는 조항으로 바뀌었다. 즉 미국이 모빌을 포함한 스페인의 플로리다 서쪽지역을 차지해도 된다는 조항이 되었다.

양국은 전쟁포로를 교환하고 미래 노예무역을 금지한다는 조항을 만들었다. 1814년 12월 24일 양국이 서명한 켄트 조약은 12월 30일 영국의 조오지 4세에 의해 공표되었고 1815년 2월 17일 매디슨 미 대통령이 수락하여 실효되었다.

 

조약 후의 역사

그 당시 미국과 영국간 편지나 소식은 2달 이상 걸렸다. 조약을 서명한 후 영국은 조약에 들어가지 않은 루이지애너 서부지역을 차지하려 했으나 1815년 1월8일 앤드루 잭슨 미 명장에 의해 뉴오얼리언스 전투에서 영군은 박살이 나고 1812년 전쟁은 종결되었다.

그 후 현재까지 미국과 캐나다는 19세기 전까지 3번의 영토분쟁이 있었지만 큰 문제없이 해결되었고 양국간 평화를 유지하고 있다.

 

앵글로색슨의 단결

원주민과 스페인은 영국과 미국이 같은 앵글로색슨 민족으로 타민족과 동맹을 맺어도 결국 자기민족들의 이익을 위한다는 교훈을 배웠다. 영국이 앵글로색슨의 모국이고 미국은 큰아들나라, 둘째가 캐나다, 셋째가 오스트레일리아, 넷째가 뉴질랜드로 세계대전들을 거처 현재 큰아들나라가 파이브 아이스를 형성하여 세계를 이끌어가고 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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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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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1-06
미국의 캐나다 침략(27)-1812년 전쟁 전후(17)

 

(지난 호에 이어)

쿡스 밀스 전투(1814년 10월 19일)

10월 17일 브라운 소장이 이이리요새 전투에서 영군을 퇴각시킨 후 이자드 소장은 브라운 소장과 함께 드러먼드 영군을 추격하지 않고 대니얼 준장의 1,200명 미군이 쿡스 밀스를 공격하게 하였다.

쿡스 밀스는 나이아가라 폭포에서 서남쪽으로 18KM 웰란드에서 동쪽으로 6KM 떨어진 영군의 곡식 저장소였다. 미군의 공격소식을 접한 드러먼드 소장은 750명의 영군을 이끄는 크리스토퍼 마이어스 중령이 미군과 대적하게 하였다.

10월 19일 아침 마이어스는 로켓포를 포함한 강력한 포사격으로 미군을 유인하려 했으나 미군은 숲속에서 영 보병대의 공격을 기다리고 있었다. 숫자적으로 열세인 마이어스는 라이언스 크릭으로 퇴각하였고 미군은 영군의 중요한 식량인 밀가루와 곡식을 불태우고 다음날 블랙크릭으로 돌아왔다.

이 전투로 미군은 12명의 전사자를 포함한 67명의 희생자를, 영군은 1명의 전사자를 포함한 36명의 희생자를 내었다. 쿡스 밀스는 1921년 캐나다 국립역사지역으로 선정되고 전투기념비를 세웠다.

 

맬캄스 밀스 전투(1814년 11월 6일)

1814년 10월 던캔 매카서 준장의 700명의 기마대는 디트로이트를 떠나 쫓기는 드러먼드 영군을 추격하는 이자드의 미군을 지원하기 위하여 영군에게 밀가루보급을 하는 테임스계곡 지역을 습격하였다. 이에 따라 애덤 뮤어 영군소령은 캐나다 의용군 400명을 소집하여 조세프 라이어슨 중령과 합세하여 수비작전에 들어갔다.

11월 5일 매카서는 바포드를 지나 브랜트로 향하는 그랜드강변에 야영을 하였다. 밤중에 이자드가 이이리 요새를 파괴하고 미국으로 퇴각했다는 소식을 듣고 매카서는 맬캄스 밀스를 습격하기로 작전을 세웠다. 맬캄스 밀스는 온태리오 호수를 장악한 영 해군을 위한 중요한 밀가루 공급지역이었다.

11월 6일 매카서는 맬캄스 밀스를 방어하는 라이어슨의 550명 캐나다 민병을 대적하게 되었다.

매카서는 고지를 차지한 캐나다 민병의 정면을 기마병으로 공격을 하여 라이어슨의 주의를 중앙으로 집중시키게 유도하며 기마병 일부를 보병으로 만들어 숨소리를 죽이며 라이어슨 캐나다민병의 양쪽을 포위하였다.

놀란 캐나다 민병들은 낮은 지대로 쫓기며 숫자적으로 열세에 몰려 전장에서 뿔뿔이 흩어지며 퇴각하였다. 매카서 미군은 맽컴스 밀스 지역의 제분소와 곡식창고를 모두 불태워 버렸다.

미군은 계속 캐나다 민병을 추격하여 도우버와 새바린에 있는 제분소도 모두 불태워 영군의 식량보급을 차단시켰다. 임무를 마친 매카서 미군은 승리감을 자축하며 200마일 떨어진 샌드위치(현 윈저)를 통하여 디트로이트로 돌아왔다.

멜컴스 밀스 전투는 1812년 전쟁에서 캐나다를 침략한 미군의 마지막 전투로 역사에 기록되었고 8월부터 담판이 시작된 겐트평화조약을 12월 마무리하는 단계에서 미 군사력이 대영제국의 침략을 방어할 수 있다는 미국의 지렛대 역할을 하게 되었다.

따라서 담판 중의 전투는 영토확장보다 담판조건을 유리하게 하는 목적이었다. 이 전투들을 통하여 신생국 미국은 강국의 발판을 만들어 유럽제국에게도 알려졌다.

이 전투로 미군은 1명의 전사자를 포함한 7명의 희생자를, 캐나다군은 18명의 전사자를 포함한 603명의 희생자를 내었다. 온타리오 서남부 오클랜드에 가면 맬캄스 밀스 전투기념비와 전투장을 볼 수 있다.

 

메인주에서 뉴욕주까지 캐나다

1812년부터 1814년까지 미국의 캐나다 침략으로 20회 이상의 전투에서 미국은 퀘벡 캐나다를 포기하고 전전긍긍하다 1814년 후반부터 온타리오주 전투에서 반전을 계속하였다.

1814년 8월 겐트 평화조약 담판이 시작할 때 뉴욕 플라츠버그 요새 전투를 지원하는 샴플레인호수 해전에서 28세의 맥다노 미 해군대위는 탁월한 해군전투력으로 36세의 다우니 영 해군대위를 항복시켜 이를 관망하던 프레이보우스트 영 총사령관은 전투력이 강한 영 지휘관들의 공격조언을 따르지 않고 영군의 후퇴를 명령하였다.

만약 프레이보우스트가 전투력이 강한 영 정규군을 지휘하여 플라츠버그 요새를 함락시켰다면 메인주 남쪽에서 뉴욕주까지 캐나다국토가 되었을 것이라고 일부 역사학자들은 분석하고 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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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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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2-23
미국의 캐나다 침략(26)-1812년 전쟁 전후(16)

 

(지난 호에 이어)

인구 2만 정도 되는 플라츠버그에 가면 플라츠버그전투 역사박물관을 방문할 수 있다. 8월 24일 워싱턴을 불사른 라스 영군은 수일간 정부는 물론 시민 재산까지 약탈하느라 시간을 보냈다.

그들은 발티모어 산업항구도시 함락작전을 세우고 5,000명의 라스 영 육군은 발티모어에서 동쪽으로 13KM 떨어진 노스포인트를 통해 발티모어로, 카크레인 영 해군은 19척의 함대를 이끌고 발티모어에서 동남쪽 5KM 떨어진 작은 섬에 위치한 맥켄리 요새를 공격하기로 작전계획을 세웠다.

이에 맞서 11,000명의 매리랜드주 의용군은 새뮤엘 스미스 소장 지휘하에 발티모어의 각 요새 방위태세에 들어갔다.

 

노스포인트 전투(1814년 8월12일)

9월 12일 오전 영 해병 1,000명을 포함한 5,000명의 영 정규군은 노스포인트에 도착하여 발티모어를 향해 진군하고 있었다. 스미스의 잔 스트리커 준장 사단은 3,200명의 의용군을 지휘하여 전략적으로 유리한 지역을 찾아 발티모어와 노스포인트 중간지점인 햄프스테드힐에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었다.

오후 1시 점심 휴식 중인 영군에 포격을 가하며 영군 선발대와 접전을 시작했다. 포 소리를 들은 라스가 점심을 팽개치고 접전지역을 향해 나섰다가 미 소총저격부대의 총탄을 가슴에 맞고 쓰러졌다. 그는 군 지휘를 아서 브룩크 대령에게 넘기고 숨을 거두었다.

오후 3시 브룩크는 영군을 재정비하고 미군과 전투를 벌였으나 훈련된 미군 소총부대에 의해 많은 희생자를 내었다. 미 포병대는 포탄이 떨어져 못, 자물쇠 등을 포함한 고철을 넣고 포를 퍼부었으나 단련된 영군에 숫자적으로 밀려 스트리커는 일목요연하게 발티모어로 퇴각했다.

브룩크는 퇴각하는 미군을 미국의 방어선까지 추격했으나 철통 같은 미 방어진을 목격하고 겁에 질려 햄프스테드 힐로 퇴각하여 영 해군이 맥켄리 요새를 함포 사격할 때까지 기다렸다.

이 전투로 영군은 46명의 전사자를 포함해 295명의 희생자를 내었고 미군은 24명의 전사자를 포함해 189명의 희생자를 내었다. 특히 이 전투로 유럽에서 명장으로 이름 떨친 라스 소장의 전사는 영군에 치명적인 타격을 주었다.

 

맥켄리 요새 전투(1814년 9월 13-15일)

조오지 아미스테드 소령은 1,000명의 의용군을 지휘하여 맥켄리 요새를 재구축하고 성곽의 포를 영 함대를 향해 조준했다.

9월 13일 카크레인의 영 함대 19척이 맥켄리 요새를 접근했다. 아미스테드는 중거리포로 영 함대를 포격하여 영 함대는 미 포병대의 사정거리 밖으로 퇴진하여 장거리포와 로켓트포로 25시간 동안 1,800개의 포탄을 퍼부었다. 그러나 철통같이 구축한 요새는 경미한 타격을 받았다.

카크레인은 주야로 함포사격을 하며 영 해병대가 미군의 포격을 피해 요새 서쪽해안상륙작전을 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14일 이른 아침 예상외로 요새에는 매리 피케스길과 그의 13세 된 딸이 만든 세로 30피트, 가로 42피트 초대형 성조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대낮같이 밝은 섬광을 일으킨 함포사격에도 요새는 건재하다는 메시지를 받은 영 해병대는 본선으로 돌아왔다.

8월 15일 1년 이상 방위책을 구축하고 단결심과 애국심으로 가득찬 1만명 이상의 미 의용군을 공격할 수 없다고 판단을 내린 브룩크는 노스포인트로 퇴각하여 카크레인 함대로 돌아와 미 남부 뉴오얼린스항으로 항해했다.

이 전투로 미군은 4명의 전사자를 포함하여 24명의 희생자를, 영군은 1명의 부상자를 내었다.

 

발티모어 전투

이상 2 전투는 발티모어 전투라고 불리고 100% 주 의용군이 세계최강 영 정규군을 퇴각시킨 역사를 만들었다. 이 전투로 미국은 영국으로 하여금 1814년말까지 겐트 평화조약을 맺도록 만들었다.

발티모어에 가면 맥켄리 요새 국립역사기념관을 관람할 수 있다.

 

미국 국가 성조기

35세의 프란시스 스캇 키 변호사는 미 포로해방을 위해 영 함대에 머물면서 영 함대의 메켄리 요새 함포사격을 관망하고 특히 25시간의 함포사격에도 14일 이른 아침 대형성조기가 휘날리는 것을 목격하며 애국심에 가슴을 적시며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1절

오 국민이여 보이는가 이른 새벽 여명 사이로

어제 황혼의 미광 속에서 우리가 그토록 자랑스럽게 환호했던

널찍한 띠와 빛나는 별들이 새겨진 저 깃발, 치열한 전투 중에서도

우리가 사수한 성벽 위에서 당당히 나부끼고 있는 것은

창공에서 포탄의 붉은 섬광과 작렬하는 폭탄 속에서

밤새 우리의 깃발이 휘날린 증거라

오 성조기는 지금도 휘날리고 있는지 알려주오

자유와 땅과 용사들의 고향에서

(2, 3, 4절 생략)

 

이 가사는 1773년 영국의 잔 스태포드 스미스가 작곡한 아나크리온에 편곡되어 1889년부터 미 해군군가로 불린다. 1931년 후버 대통령에 의해 미국 국가로 채택되었다. 그전까지 미국 국가는 영국 국가를 미국내용으로 편곡해서 불렀다.

성조기의 가사 내용은 평화와 자유는 투쟁에서 승리하여 지켜지는 것을 강조한다. 농경사회 이후 부족간이나 국가간 인류역사의 평화는 오로지 투쟁력으로만 이루어지는 인류역사를 증명하고 있다. (다음 호에 계속)

 

 

 

 

donyoo
유동환
92858
63050
2021-12-16
미국의 캐나다 침략(25)-1812년 전쟁 전후(15)

 

(지난 호에 이어)

겐트 평화조약을 위한 전략

나폴레온 전쟁 중 프랑스와 미국의 무역을 금지하기 위해 영국이 미국의 상선을 계속 나포했기 때문에 미국의 선전포고로 1812년 전쟁이 일어났으나 1814년 4월 나폴레온 전쟁이 끝남으로 양국은 전쟁 명분이 없어졌다.

따라서 양국은 1814년 8월부터 벨지움 겐트에서 평화협상을 시작했다. 협상을 유리한 조건으로 이끌기 위해 웰링턴 장군은 1814년 9월까지 나폴레온 전쟁에 전투경험이 풍부한 3만 명의 군대를 캐나다에 파병했고 헨리 베서스트 영 국방장관은 조오지 프레이보스트 캐나다 총독에게 1814년 내에 미국을 침공하여 영토를 확장하라는 특명을 내렸다.

프레이보스트는 몬트리얼에서 세인트 로렌스강을 따라 북동쪽 90KM 떨어진 소럴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리셜루강을 따라 170KM 떨어진 뉴욕주의 샴플레인 호수 서쪽에 플래츠버그를 함락시키는 작전을 세웠다. 몬트리얼에서 플라츠버그까지 육로로 101Km가 된다. 샴플레인 호수를 장악하여 캐나다에서 강을 따라 뉴욕시까지 침투할 수 있는 전략이었다.

 

양군 육군병력

프레이보스트는 11,000명에서 선발된 9,000여명의 영 정예군과 퀘벡 정예군을 육로를 통해 진군하게 하였다. 이에 맞서 암스트롱 미 국방장관은 알랙샌더 매컴 준장을 플라츠버그 사령관으로 임명하였다.

매컴은 주의용군 2,900명을 포함한 6,354명의 미 군대를 플래츠버그로 소집하여 수비진영을 구축하였다.

 

양군 해군병력

36세의 조오지 다우니 영 해군 대위는 1,200톤 콘피안스함을 포함한 16척 총 2,402톤의 영국함대를 이끌고 삼플레인 호수로 진입하였다.

28세의 토마스 맥다노 미 해군 대위는 734톤의 새라토가함을 포함한 14척 총 2,264톤의 미국 함대로 플라츠버그를 수비하였다.

 

플라츠버그 전투, 샴플레인 해전(1814년 8월 31일~9월 11일)

 

8월31일

프레이보우스트 영군 9,000명은 뉴욕 남쪽으로 진군하였다. 매콤의 1,260명 미군은 포를 이용한 소접전을 벌이며 영군 진로에 방어책을 구축하며 퇴각하였다.

9월 6일

영 대군은 힘들이지 않고 방어책을 제거하며 플라츠버그에 도착했다.

9월 7일

영군은 플라츠버그 요새 공격을 위해 새라낙 도강을 시도했으나 지역 지리에 대한 정보부족으로 미군의 산발적인 공격에 당황하여 도강을 포기하고 포병부대 진지 구축을 시도했다.

9월 9일

미군은 불덩어리포로 영군의 포공병부대를 불사르고 50명의 미 특공대는 영군이 자랑하는 로켓포 부대를 궤멸시켜버려 영군은 안전지역으로 퇴각하였다. 유럽 실전경험이 많은 영군은 얕은 강변을 따라 도강을 했지만 프리보우스트의 명령으로 영 해군의 함포사격 지원을 기다려야 했다.

맥다노는 영해군의 장거리포를 피해 화력이 강한 단거리포를 장착한 대형함대 4척을 플라츠만 남북으로 세우고 그 사이를 소형전투함 10척이 정박하게 하였다. 모든 군함은 용수철 달린 닻줄로 선미와 선두에 연결된 닻을 내려 짧은 시간에 전투함이 90도나 180도 선회할 수 있게 만들었다. 새라토가함은 360도 회전이 가능하게 정박을 하고 영 해군함대가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9월 11일

7시 40분 영 해군은 미 함대를 접근하여 9시 45분 콘피안스함의 다우니는 새라토가함에 함포사격을 가하여 미 해군의 5분의 1이 산화하고 맥다노는 부상을 입었다.

정신을 가다듬은 맥다노는 파손된 새라토가함을 오른쪽으로 90도 바꾸어 측면에서 파괴력이 좋은 단거리포로 콘피안스함을 파손시켰고, 배의 흔들림으로 벗어난 포에 다우니함대 사령관이 압사당했다.

미풍으로 영 함대는 항해는 물론 방향을 바꾸지 못해 좌우자재로 방향을 틀어 측면에서 함포사격 할 수 있는 미 함대에 영 함대는 차례로 항복을 해야 했다. 다우니 외에도 많은 영 해군장교가 사망이나 부상을 당해 결국 영 해군 장교들은 3시간내의 맹렬한 함포 사격 끝에 모두 항복하고 새라토가함에 올라와 검을 내려놓고 항복식을 거행했다.

28세의 맥다노는 “당신만큼 소중한 검을 칼집에 넣으시요”라고 말하고 양군부상병들을 미군 병원에 치료를 받게 하여 그의 전투능력과 신사도의 명성을 떨쳤다.

프리보우스트와 매컴은 육지에서 해전을 관망하고 있었다.

전령으로부터 다우니의 영 함대가 항복했다는 소식을 확인 받은 프리보우스트는 영군의 퇴각명령을 내리고 캐나다로 후퇴했다. 실전경험이 풍부한 영국 장성들은 단시간 내에 플라츠버그를 함락시킬 수 있다고 항의를 했으나 퇴각명령에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

이 전투로 미군은 104명의 전사자를 포함해 220명의 희생자를 영군은 168명의 전사자를 포함하여 939명의 희생자를 내었다. 프리보우스트는 영국으로 소환되어 군사재판을 받게 되었지만 그가 전투를 감행하여 플라츠버그를 점령했다 하더라도 샴플레인호의 영 해군몰락으로 군수품보급이 불가능하여 요새를 수비할 수가 없기 때문에 후퇴했다고 자신을 변호하여 형을 받지 않았다. 웰링턴 장군도 프리보우스트의 전략이 옳았다고 변호했다.

플라츠버그 전투로 미국은 겐트평화조약을 유리하게 이끌어가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다음 호에 계속)

 

 

 

donyoo
유동환
92740
63050
2021-12-09
미국의 캐나다 침략(24)-1812년 전쟁 전후(14)

 

(지난 호에 이어)

1814년 9월21일 이이리 요새 포위전투에서 영군을 퇴각시킨 미군은 영군을 추적할 수 있었으나 조오지 이자드 소장의 늑장으로 드러먼드 영군을 항복시킬 기회를 놓쳤다. 10월 15일 온태리오호수를 장악한 영 해군이 미군의 보급을 차단하여 이자드 미군은 10월 17일 이이리 요새를 파괴하고 미국 새키츠항으로 퇴각하였다. 이이리 요새를 재탈환한 영군은 폐허가 된 요새를 재건하지 않았다.

 

영해군의 체사피크만 봉쇄

1812년 이후 영 해군은 600척의 함대로 전세계 해양을 통제하고 있었다. 그 중 85척은 핼리팩스에서 플로리다까지 대서양연안을 선회하고 있었다.

1813년 3월 웰링턴 장군은 미국 델라웨어주, 매리랜드주, 버지니아주 연안을 잇는 체사피크만을 봉쇄하도록 특명을 내리고, 미 대서양지역을 관할하는 알렉산더 카크레인 영 해군 중장을 지원하도록 조오지 코번 영 해군소장을 파견했다. 코번은 메리랜드주 프렌치타운을 비롯하여 세 개의 작은 도시를 불태웠다.

이에 대비하여 7월 저슈와 바니 미 함대사령관은 소형 전투함대를 건축하여 대응을 하였지만 계속 몰려오는 영 해군 함대에 역부족으로 체사피크만을 지키지 못했다.

1814년 4월 나폴레온을 패배로 이끈 웰링턴은 체사피크만을 통한 미국 침공의 특명을 내리고 대륙전투에서 공을 세운 라버트 라스 소장과 전투경험이 풍부한 2,500명의 영군을 파병하였다.

8월초 버뮤다 영 연방에 도착한 라스는 버뮤다에 상주하는 미국의 전 노예출신인 흑인 해병대 200명과 버뮤다의 영 해군함대를 동원하여 체사피크만에 도착하였다.

침투지역은 카크레인이 영 해군 중장이 결정해야 했다. 결국 워싱턴 미국 수도를 공격하기로 결정되어 8월 19일 라스의 영군이 매리랜드주 베네딕트에 도착하여 8월 21일 나팅햄에 집결하였고, 카크레인의 영 해군에 몰린 바니 미 소형함대는 전투함을 불태우고 워싱턴으로 퇴각하여 영 해군은 체스피크만을 완전 봉쇄하였다.

 

블라든스버그 전투(1814년 8월 24일)

7월초 암스트롱 미 국방장관은 영군이 미국의 산업도시 매리란드주 발티모어를 공격할 것이라 믿었다. 매디슨 대통령은 스토니크릭 전투에서 포로로 잡혔던 와인더 준장을 워싱턴 수비사령관에 임명했고, 만약을 위해 워싱턴의 중요한 서류나 비품을 갖고 버지니아주 리스버그로 피난을 했다.

달리 매디슨 국모는 폴 제닝스 흑인노예와 함께 워싱턴 초대 대통령의 초상화를 프레임에서 떼어내어 다른 귀중품과 함께 보존하여 현재까지 미국의 정체성을 지키고 있다.

6,370명의 미군을 지휘하는 와인더는 8월 23일 새벽 2시 반에 워싱턴으로 향하는 교각을 불태웠다. 8월 24일 로켓포 부대를 갖춘 라스의 4,500명 영군은 남쪽으로 진군하는 척하다가 방향을 바꾸어 정오에 얕은 강변을 건너 교각을 지키는 미군을 격퇴시키고 워싱턴 북동쪽 12KM 떨어진 블라든스버그에 진입하였다.

지리적으로 높은 곳에 포 부대를 둔 미군은 진입하는 영군을 퇴각시키고 수비 할 수 있었으나 지휘관 재질이 결핍된 와인더는 훈련이 잘되지 않은 미 의병들을 통솔할 수 없어 용맹스럽게 진격하는 영군에게 왼쪽 수비진이 흐트러지고 영군에 포위되자 와인더는 퇴각명령을 내렸다.

후퇴작전을 세우지 않아 일부 통신전달이 되지 않은 극소수 미군은 끝까지 싸우다 포로가 되었고, 영군은 워싱턴까지 확 터진 길을 일사천리로 진격하였다. 이 전투로 영군은 전사자 64명을 포함하여 250명의 희생자를 내었고 미군은 20명의 전사자를 포함하여 190명의 희생자를 내었다.

인구 9,400의 블라든스버그에 가면 전쟁기념비를 볼 수 있다.

 

불타는 워싱턴

오후 늦게 워싱턴을 점거한 영군은 시민들의 주거지를 제외하고 워싱턴 의사당과 대통령관저 등 모든 공공건물을 불태웠다. 1813년 4월 27일 미군이 캐나다 온태리오주 요오크(현 토론토)시를 불태운 것에 대한 앙갚음으로 해석된다. 미 역사는 이 사변을 미국의 치욕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 후 워싱턴시는 재건이 되었고 의사당을 비롯하여 대통령관저는 흰 석조건물로 변신되어 백악관으로 불려지고 있다.

1814년 8월24일 이후 미 합중국 수도 워싱턴은 2001년 9.11테러 공격을 받을 뻔 했지만 무사했다.

207년 후 2021년 1월6일 소시오 사이코패스로 알려진 트럼프의 노골적인 암시로 수백 명의 공화당 골수분자들에 의해 미 의사당은 테러공격을 받아 한 순간 점거되었으나, 미 정부는 침입자들을 몰아내고 형법으로 처리하고 있다. 트럼프는 미 의사당 침입사건 주모로 탄핵 검거되지 않았지만 미국의 치욕으로 세계역사를 장식하게 되었다. (다음 호에 계속)

 

 

 

donyoo
유동환
92628
63050
2021-12-02
미국의 캐나다 침략(23)-1812년 전쟁 전후(13)

 

(지난 호에 이어)

런디스 래인 전투에서 무승부로 헤어진 브라운 중장의 미군은 이이리호수가 흘러 들어가는 나이애가라강 입구에 차지한 이이리요새로 후퇴하여 군을 재정비하였다. 브라운 미군이 7월 3일 영군을 쫓아내고 점령한 온타리오주 이이리요새는 6개의 포만 있었고 양쪽 모서리에 공격방어용 보루가 완성되지 않고 전체적으로 수비가 힘든 요새였다.

브라운은 보루와 참호를 재보수하고 2,800명의 군사를 수용할 수 있도록 흙 담으로 요새를 500미터 이상 넓히고 육지와 호수를 향한 포를 배치시켰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쿠인스턴으로 일단 후퇴한 드러먼드 중장은 영군을 재정비하고 4,800명의 군사로 미군이 차지하는 이이리요새를 포위공격하기로 작전계획을 세웠다. 이이리요새를 차지한 미군의 온태리오주 점령을 방어하는 드러먼드의 전술책이었다.

 

이이리요새 포위전투(1814년 8월3일– 9월 21일)

8월 3일

드러먼드는 600명의 영군을 동원하여 미군의 보급을 끊기 위해 버팔로와 블랙락을 공격하였다. 이를 감지한 240명의 미군은 버팔로에 이르는 교각을 파괴하고 이를 수리하려는 영군을 기습 공격하여 영군은 희생자를 내면서 퇴각하였다.

8월 12일

미국의 소형전투함은 이이리요새 포위작전 보루를 공사 중인 영 공병대를 향해 함포사격을 계속했다. 드러먼드는 온타리오주 조오지 요새로부터 영 해군과 해병대를 육지로 진군시켜 미 함대를 작은 나룻배로 유인하여 오하이오함과 서머스함을 나포하여 쾌거를 올리고 이이리호수를 장악했다.

8월 13일

드러먼드는 수륙으로 맹렬한 포 공격을 계속했으나 이이리요새는 잘 버티고 있었다. 드러먼드는 영군을 세 갈래로 나누어 이이리요새를 포위공격작전을 세웠다. 그러나 그의 상세한 작전계획은 영군 도망병에 의해 브라운에게 알려졌다.

8월15일

첫 번째 공격을 맡은 빅터 피셔 중령은 영군 1,300명을 이끌고 새벽 2시 요새남쪽 700m 지역을 진군하다 미군의 수색대에 기습공격을 받았다. 미 수색대는 작전상 후퇴를 하여 영군을 전초기지로 유인하였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내사니엘 타우슨 대위의 미 포병대는 영군에 무자비한 포격을 가해 계속 사상자가 늘어나 여러 번 공격시도 끝에 영군은 후퇴하고 말았다.

두 번째 공격을 맡은 허큘리스 스캇 대령은 새벽 3시 영군 700명을 이끌고 북쪽 요새로 진격하다 피셔가 당한 비슷한 미 전략에 걸려들어 더글라스 포병대의 포 세례를 받고 많은 사상자를 내고 후퇴하여 윌리엄 드러먼드 중령 군에 합류하였다. 드러먼드 중령은 드러먼드 총사령관의 조카뻘 되는 친척이었다.

이와 동시에 어둠을 이용한 드러먼드 중령의 영군 360명이 요새 북서쪽에 있는 미 포병대를 습격하여 포를 포획하고 미군의 병동과 식당을 향해 진격전을 벌였다. 영군이 빼앗은 대포로 미군을 향해 포격하기 시작하는 중 거대한 폭약저장고가 점화되어 폭발대참사가 일어나 캐나다군을 포함한 영군 250명이 희생되었다.

2톤짜리 철 대포를 100 야드까지 날려보낸 큰 폭발력이었다. 영군은 요새를 지뢰밭으로 오인하고 공포에 싸여 후퇴를 했고 다음날 드러먼드 중령을 포함한 전우들의 죽음을 비통해 하였다. 이이리요새 공격에 패배한 드러먼드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영군지원을 요청했다.

9월 4일

포터준장은 영군 포병대를 공격하여 6시간의 전투를 벌이다가 천둥과 폭우로 인해 전투를 멈추었다. 이 전투 중 두 명의 영군과 캐나다군장교가 사살되었다.

9월 17일

포터의 미군 1,600명은 영군 제3포병대 포를 포획하였고 제임스 밀러 준장의 미군은 영국 제2포병대 포를 포획하였다. 드러먼드는 총 반격을 가하여 두 시간의 치열한 전투로 노획된 포를 되찾았다. 퇴각하는 미군은 영국 제2포병대의 포를 사용하지 못하게 못을 박았다.

9월21일

두 달간 집요하게 미군을 공격하던 드러먼드는 영군이 병들고 식량도 고갈되어가고 차가운 비바람에 취침할 텐트와 보급품이 떨어져 치프와강을 지나 조오지 요새로 후퇴하여 이이리 요새 포위작전은 미군의 승리로 끝나 미군의 위상이 또 한번 올라갔다.

이이리 요새 포위전투는 1812년 전쟁 중 가장 긴 전투로 알려졌다. 참전한 2,800명의 미군은 213명의 전사자를 포함하여 총 1,075명의 희생자를 내었고, 캐나다군과 원주민 전사를 포함한 4,800명의 영 정규군은 285명의 전사자를 포함하여 총 1,557명의 희생자를 내었다. 치열한 전투에 선두를 지휘하는 양군 장성들이 한결같이 총상을 받던지 전사를 했고 포로가 되었다.

올드 이이리 요새는 1937년 나이애가라 공원에 캐나다국립역사지역으로 지정되었다. (다음 호에 계속)

 

 

donyoo
유동환
92502
63050
2021-11-25
미국의 캐나다 침략(22)-1812년 전쟁 전후(12)

 

(지난 호에 이어)

스캇 준장의 공로로 치프와 전투에서 승리한 브라운 소장의 미군은 온태리오 호수로 연결되는 나이애가라 강변에 차지한 조오지 요새로 후퇴한 라이알의 영군 측면을 포위하였다.

그러나 찬시 미 해군사령관의 병고로 미 해군이 필요한 전투함건축이 계속 지연되어 온태리오주는 영해군이 장악하게 되었고, 조오지 요새를 함포 사격할 수 없어 브라운의 미군은 조오지 요새로부터 남쪽으로 10KM 떨어진 온태리오주 쿠인스턴에 진을 치고 벌링턴 진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 소식을 접한 라이알 영군은 치프와에서 북서쪽으로 11KM 떨어진 온태리오주 나이애가라 폭포 런디스 래인고지로 진군하였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1814년 7월 25일 온태리오주 캐나다 부총독 고오든 드러먼드 중장은 조오지 요새에 도착하여 나이애가라 전투 총지휘를 맡았다.

드러먼드는 영군이 나이애가라 동쪽에서 미군을 공격하여 미군이 서쪽으로 퇴진하게 길을 열어놓았으나 라이알의 영군이 북쪽에 있는 런디스 래인고지에 진을 치고 있는 줄 몰랐던 브라운은 북쪽으로 진군하여 영군을 조오지 요새로 몰아내는 역공격을 감행하기로 했다.

 

런디스 래인고지 전투(1814년 7월 25일)

미군이 런디스 래인으로 진격하는 것을 목격한 라이알은 조오지 요새로 후퇴하려고 했으나 증원군을 보내주는 드러먼드의 작전명령으로 런디스 래인고지를 고수하게 되어 저녁 6시에 증원군과 함께 고지에 집결하였다.

스캇은 영군의 포병대가 런디스 래인고지에 진을 친 것을 모르고 확 터진 전장을 통해 영군을 추격하다 영군의 포격을 받아 주춤하고 토마스 제섭 소령이 이끄는 미 연대를 영군의 좌측대열을 공격하게 하였다.

제섭은 숨겨진 숲길을 통해 영군에 발각되지 않고 캐나다민병과 원주민전사를 포함한 영군의 좌측대열을 기습 공격하였다. 놀란 영군은 반격을 가했으나 미군에게 쫓기게 되었고 부상당한 라이알 소장은 영 장교들과 포로가 되었다. 드러먼드는 영군의 좌측을 보강하기 위해 중앙대열을 후진으로 보내어 영 포병대는 미 보병대에 노출되었다.

어둠이 찾아올 때 용맹한 스캇 사단은 많은 희생자가 속출하였다. 브라운은 엘리저 리플리 준장 사단과 피터 포터 준장 사단을 스캇 사단과 교체하였다. 리플리와 포터의 엄호사격을 받으며 제임스 밀러 소령의 보병연대는 영 포병대의 대포를 포획하였다. 뒤늦게 영군이 역 공격을 했지만 미군에 의해 퇴치되었다.

목에 상처를 받은 드러먼드는 영군을 재정비하여 미군에게 뺏긴 포를 쟁취하려 했지만 미군의 역습을 받아 일단 후퇴를 하고 두 번째 공격을 시도 했으나 미군의 정돈된 수비력에 실패를 거듭했다.

집요한 드러먼드는 자정이 되기 전 영군을 총 집합하여 세 번째 공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캐나다민병과 원주민전사는 영 정규군과 호흡이 맞지 않아 어둠에 갈팡질팡하며 적과 아군을 구분하지 못하고 닥치는 대로 육박전을 벌이다 포 획득을 포기하고 끝내 후퇴하고 말았다.

어둠 속에서 6시간 각축전에서 양군은 많은 희생자를 냈고, 스캇과 브라운도 중상을 입었다. 명장 스캇은 증상이 심해 후방으로 옮겨졌다. 물과 보급품이 떨어져 브라운은 후퇴를 명령했다. 리플리와 포터는 진격을 원했지만 브라운의 지시를 따라야 했다. 양군은 야간전투에서 서로 빼앗은 포를 갖고 후퇴를 했다.

26일 새벽에 1,200명의 미군을 통솔한 리플리는 드러먼드의 영군 2,200여명이 포티지 전투지역을 장악한 것을 보고받고 브라운의 미군과 함께 이이리 요새로 후퇴하였다. 후퇴하는 미군을 목격한 드러먼드는 쿠인스턴으로 집결하여 증원군을 대기하였다.

벌링턴으로 진격하려던 브라운의 작전계획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미군은 나이애가라 지역에서 영군과 대치상태로 전투를 마감했다.

2,500명의 미군은 174명의 전사자를 포함하여 855명의 희생자를 냈고, 3,500명의 영군은 84명의 전사자를 포함하여 867명의 희생자를 내어 1812년 전쟁에서 가장 많은 희생자를 기록했고, 야간에 피비린내 나고 무참한 전투를 승패 없이 마감했다.

그러나 미군은 치프와 전투에 이어 런디스 래인 전투를 통해 막강한 영 정규군에 대항할 수 있는 전투력을 과시하게 되었다. 1937년 캐나다는 나이애가라 런디스 래인 지역에 기념탑을 세우고 국립역사지역으로 지정했다. (다음 호에 계속)

 

 

 

donyoo
유동환
92362
63050
2021-11-19
미국의 캐나다 침략(21)-1812년 전쟁 전후(11)

 

(지난 호에 이어)

퀘벡 침공을 포기한 후 미군은 12월 10일 뉴아크(현 나이애가라 온 더 레이크) 를 불태워 어린이를 포함한 주민들은 강추위에 집을 잃게 되어 주민들로부터 잔인함의 원성을 샀고, 영국군은 1813년 12월 19일 나이아가라 강과 온타리오 호수 중간을 차지한 나이애가라 요새를 공격하여 미군을 쫓아내는 보복전을 감행하였다.

 

나폴레온 패배로 인한 미국전략

1814년 봄 나폴레온의 패배로 영국이 유럽대륙전쟁의 영국병력을 캐나다로 이동시킬 것을 예견한 매디슨 대통령은 영군이 캐나다에 도착하기 전에 온타리오주 캐나다를 점령하여 영국과의 평화회담을 유리한 조건으로 이끌어가는 전략을 세웠다.

이에 따라 암스트롱 미 국방장관은 뉴욕주 플래츠버그와 버팔로우에 미 정규군훈련소를 세우고 조오지 이자드 준장과 윈필드 스캇 준장을 각각 훈련소장으로 임명하였다.

스캇 버팔로우 훈련소장은 프랑스혁명군 훈련지침서에 의한 강행훈련을 하루에 10시간씩 실시하고, 낙오자나 정치력으로 들어온 무능하고 군인정신이 약한 장교들을 고향으로 보내 정예군 양성훈련에 총력을 기울였다.

 

미군과 영군의 대치

암스트롱은 제이컵 브라운 소장을 임명하여 영군의 집결지로 알려진 온타리오주 킹스턴을 점령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브라운은 영군의 공격력을 분산시키기 위해 의용군을 포함한 미군 일부는 나이아가라 강변지역을 공격한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실제로 킹스턴을 공격하려면 찬시 미 해군사령관의 함포사격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찬시는 7월 중순 전투함을 건조하기 전까지 기다려야 된다고 하여 브라운은 나이아가라 강 지역을 공격하기로 결정하고, 이리호수 요새를 영군으로부터 쉽게 탈취하고 7월 3일 강변에 집결하였다.

정규훈련을 마친 미군의 총 병력은 이로코이 원주민전사 600명, 미 의용군 750명을 포함하여 3,500명 이상이 되었다.

한편 퀘벡 침공에 실패한 미군을 오합지졸로 본 피니스 라이얼 영군 소장은 브라운의 미 정규군을 경시하여 2,000명이면 미군을 몰아낼 수 있다고 믿고 미군과 대치하였다. 그는 이리호수 요새도 영군이 수비하는 줄 알고 있었다.

 

치프와 전투(1814년 7월 5일)

7월 5일 라이얼 캐나다 민병과 원주민 전사를 포함한 영군 선발대는 치프와강을 건너 아침식사 중인 미군부대를 급습하였다. 브라운은 길을 닦으며 일단 후퇴를 명령하고 질서정연하게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이때 스캇 미 포병대는 진군하는 영군에 포격을 가하고 이에 맞선 라이얼의 영 포병대는 미 포격에 대부분 박살나고 말았다. 스캇 사단은 좌우중앙으로 질서정연한 전투태세로 우측의 포사격 지원을 받으며 영군과 전투에 맞섰다.

청색 미 군복을 보급받지 못해 회색군복을 입은 미 정규군을 훈련 받지 못한 민병으로 착각한 라이얼은 영 포병대의 포격으로 후퇴시킬 수 있다고 믿었지만 포격에도 흩어지지 않고 공격태세를 늦추지 않는 미군에 당황했다.

혼란에 빠진 영군은 대열이 흩어지고 고르지 못한 전투지역에서 일렬종대로 진격하는 영 선발대는 미군과 근접하여 영 포병대는 포격을 멈추어야 했고 라이알의 일렬횡대는 미군의 포격에 시달려야 했다.

특히 미 포병대의 산탄포는 영군을 계속 쓰러트렸다. 스캇은 U자 행렬로 영군을 포위하여 25분간 치열한 육박전에 들어갔다. 외투에 총격을 받은 라이알은 영군의 엄호 포격 하에 후퇴를 명령하였다.

스캇은 경적필패로 쫓기는 라이얼 영군을 추격하지 않았고 이로코이 전사만 영군을 치프와까지 추격하였다.

실제로 이 전투에 참전한 2,100명의 미군은 60명의 사망자를 포함하여 328명 희생자를 내었고, 2,000여명의 영군은 108명의 사망자를 포함하여 518명의 희생자를 내었다. 독립전쟁 이후 처음으로 미 정규군이 영 정규군과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어 미 정규군의 위상이 영국은 물론 유럽대륙에 알려졌다.

이 전투지역은 온타리오주 치프와에 캐나다국립역사지역으로 지정되어 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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