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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환의 생활경제칼럼

유동환의 생활경제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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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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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048
2022-03-10
미합중국의 건국국부들(29)-제임스 먼로(3)

 

(지난 호에 이어)

 

대통령 재임(1817-1825)

국내정책

1817년 먼로는 8년간 탐킨스 부통령 잔 쿠인시 애담스 국무장관 윌리엄 크라프트 재무장관을 중심으로 내각을 형성하였다. 앤두루 잭슨의 사양으로 잔 캘훈을 국방장관에 임명하였다.

1812년 전쟁 후 국민을 안심시키기 위해 먼로는 두 번에 걸친 장거리 여행으로 미 각주를 방문하며 미 국민과 연방정부의 신뢰를 쌓고 평화의 기쁨을 나누었다.

먼로는 재임시 미시시피주(1817), 일리노이주(1818), 앨러바마주(1819), 매인주 (1820), 미저리주(1821)를 미연방에 편입시켰다

 

미저리 타협(MISSOURI COMPROMISE 1819)

1819년 노예해방법을 반대하는 미저리 주민들의 반발로 먼로는 1820년 1월 26일 매인주를 완전 노예해방주로 미저리주를 노예허용주로 선정하고 위도 36.6도 이상의 주는 노예제한지역으로 결정하는 미저리 타협을 맺었다.

 

1820 대선(1820)

국민의 화합정책으로 먼로는 1820년 12월 1일 두 번째 대선출마에서 선거인단 232명중 231명의 다수 득표로 99.5%의 지지를 받고 대통령 재임을 하게 되었다.

 

1819경제공황(1819-1821)

1812년 전쟁 발발 이후 미국은 유럽과 무역으로 호황시기를 만나 중앙은행이 돈을 계속 풀어 서부개척으로 인한 토지투기가 성행하였다. 그러나 전후 유럽국가는 농산품과 공산품을 유럽자국에서 생산하여 미국의 수입품을 급감시켰다.

이에 미 중앙은행은 융자를 제한하여 시중에 돈이 돌지 않아 모기지를 낼 수 없는 토지투기가들의 파산이 급증하고 실업자가 증가하여 미국은 건국 후 처음으로 1819년 경제공황을 맞게 되었다.

먼로는 운하개척 등 인프라투자정책과 수입세 인상을 고려했으나 연방정부의 권한이 제한되어 공황에 대한 경제정책에 속수무책이었다. 1821년까지 계속된 경제공황 중 두 배로 늘어난 시중은행들이 거의 모두 파산되고 12,000명 이상의 실업자들은 후에 텍사스주로 편입된 멕시코계의 텍사스공화국으로 이주하였다.

 

국제정책

1817년부터 2년간 먼로는 영국과 화친을 맺고 5대호를 중심으로 캐나다와 국경을 확실시하고 양국의 해군증강을 제한 하였다. 1824년에 먼로는 러시아와 알라스카를 중심으로 국경선을 그었다.

 

플로리다 영입(1819)

1818년 스페인은 중남미 식민지국들의 독립전쟁과 나폴레온 전쟁으로 국력이 쇠약해진 상태에서 플로리다거주 미 국민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세미놀 원주민의 공격을 받고 있었다.

먼로는 잭슨을 보내 세미놀 원주민을 격퇴시켰다. 잭슨은 계속 스페인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다. 잭슨의 스페인 지역 점령은 스페인과 전쟁을 벌이는 것과 같다는 미상원의 반발로 먼로는 애덤스를 보내 스페인과 협상을 하게 하였다. 애덤스는 1819년 스페인과 애덤스-오니스협상을 통해 무일푼으로 서부 플로리다와 플로리다를 영입하였다.

명목상으로는 플로리다 거주 미 국민이 스페인에게 반란을 일으키는 과정에서 발생한 플로리다 거주 미국민의 손실을 5백만 달러에 보상해 준다는 조건이었다.

 

먼로 독트린(MONRO DOCTRINE 1821)

1822년 먼로는 스페인으로부터 아르헨티나, 페루, 컬럼비아, 칠레, 멕시코의 독립을 인정하였다. 이는 미국이 중남미의 해방된 식민지국가들과 경제교류와 외교를 통해 그들의 확고한 독립을 유럽강국에게 알리는 것이었다.

나폴레온 전쟁에 승리한 러시아의 알렉샌더 1세는 1821년 영국을 제외한 유럽강국들과 홀리 얼라이언스를 창시하고 알래스카를 통해 북미를 침공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이 기구에 참가하지 않은 영국은 먼로와 손을 잡고 앵글로색슨족만 미주를 통치해야 한다는 결의에 동조했다.

먼로는 1821년 12월 2일 영국의 지지를 받고 독자적으로 미국은 유럽분쟁에 동참하지 않고 유럽제국은 중남미를 포함한 미주에 식민지정책을 포기하라는 먼로 독트린(MONRO DOCTRINE)을 선포했다.

 

은퇴(1825-1831)

1825년 3월 먼로는 먼로 힐에 돌아와 버지니아대학의 명예이사가 되었고 동년 8월 아담스 6대 대통령을 초청하여 미국을 방문하는 라파이엣트를 접대하였다. 먼로는 대통령 재임시 진 빚을 농장을 정리하여 갚았지만 항상 빚에 쪼들리며 조촐한 은퇴생활을 했다.

1830년 부인 엘리자베스가 사망한 후 먼로는 뉴욕시로 거주지를 옮기고 1831년 7월 4일 사망하였다. 그의 시신은 버지니아주 헐리우드 장지에 안장되어있다. 독립선언문을 같이 만든 토마스 제퍼슨과 잔 애담스가 1826년 미 독립 50주년 기념일 5시간 차이로 세상을 떠난 5년 후 먼로는 미 독립기년일에 사망한 세 명의 미합중국 건국국부들 중 마지막이 되어 미국을 이끌어가는 지도자들의 영적인 애국심을 고취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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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환
94260
63048
2022-03-03
미합중국의 건국국부들(28)-제임스 먼로(2)

 

(지난 호에 이어)

 

중견정치인

프랑스 외교(1794-1796)

1794년 미 대사로 프랑스에 파견된 먼로는 프랑스의회에서 프랑스대혁명 이후 채택된 공화정책을 찬양하는 연설을 하여 기립박수를 받았다. 그는 프랑스와 미국의 무역보호정책을 체결했다.

그러나 한 달도 못되어 미 대사로 런던에 파견된 잔 제이는 미국과 프랑스 양국간에 무역제한을 암시하는 제이 조약을 영국과 맺어 먼로를 황당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친불정책을 고수하는 먼로는 특출한 외교수단으로 프랑스로부터 미국이 미시시피강을 항해할 수 있는 특혜를 받았다.

워싱턴은 미국이 영국의 재침략을 버틸 수 있는 군사강국이 될 때까지 영국과 화친해야 된다는 긴 안목을 갖고 있었다. 반면 제퍼슨과 먼로는 미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끌게 도와준 프랑스의 도움을 저버릴 수 없다고 실리보다 감정적인 이유로 친불정책을 주장했다.

워싱턴의 정책을 감지 못하고 먼로는 제퍼슨과 함께 제이조약을 맺게 한 워싱턴을 비판했다가 1796년 경질되어 고향으로 돌아와 변호사업에 복귀했다.

 

루이지애너 매입(1802-1803)

1799년부터 1802년까지 버지니아 주지사로 당선된 먼로는 1800년 토마스 제퍼슨 대선후보를 지지하였고 버지니아주 선거인단의 득표를 얻어내어 제퍼슨을 대통령에 당선시키는 계기를 만들었다.

1802년 제퍼슨은 플로리다 서쪽지역과 뉴오얼린스를 프랑스로부터 구입하기 위해 프랑스와 협상하는 라버트 리빙스턴 미대사를 지원하기위해 먼로를 파리에 파견하였다. 1803년초 먼로는 리빙스턴과 함께 1천만 달러의 오퍼를 내었다. 계약을 빨리 맺기 위해 나폴레온과 직접 담화를 신청한 먼로는 전비가 필요한 나폴레온으로부터 뉴오얼린스에서 북쪽 캐나다 접경까지 포함하는 거대한 루이지애너를 1500만 달러가격으로 카운터 오퍼를 받았다.

먼로의 예산은 900만 달러였으나 미국 영토의 2배 되는 땅을 매입할 수 있다는 기회를 잡아 카운터 오퍼를 수락했다. 플로리다 서부지역은 스페인의 관할지역으로 제외되었다.

먼로의 즉각적인 결정을 찬양한 제퍼슨은 미 상원을 설득하여 루이지애너 지역을 구입하게 되었다. 1805년 먼로는 스페인을 방문하여 플로리다 서쪽지역 양보를 요청했으나 스페인으로부터 거절당했다.

 

먼로 핑크니 조약(1896년)

1803년 영국주재 미 대사관직을 맡은 먼로는 1794년 맺은 제이조약의 10년 만기를 연장하는 먼로 핑크니 조약을 맺었다. 제퍼슨은 영국의 야욕을 수긍할 수 없다고 상원에 제출하지도 않고 묵살시켜 후에 1812년 전쟁을 야기시키는 계기를 만들었다.

 

고위정치인

국무장관 및 국방장관(1811-1816)

먼로 핑크니조약을 수긍하지 않은 제퍼슨은 먼로와 사이가 껄껄해지면서 1808년 차기 대통령선거에 제임스 매디슨을 밀어주어 먼로는 1808년 대통령선거에 낙선의 패배를 감수하고 매디슨 행정부의 국무장관직을 맡았다.

나폴레온 전쟁이 영불간의 전쟁으로 심화되면서 양국은 상대국과 교역하는 미국상선을 대서양에서 나포하여 미국을 괴롭혔다. 먼로는 나폴레온을 설득시킬 수 있었으나 영국의 횡포를 전쟁 외에는 막을 길이 없었다.

먼로는 영국과 불가피한 전쟁을 매파 헨리 클레이 상원과 동조하여 매디슨이 1812년 전쟁 선전포고를 결정하게 되었다. 전쟁초기에 캐나다를 침공한 미군이 수세에 몰리자 매디슨은 영국과 화친을 맺으려 했으나 영국이 들어줄 이유가 없었다.

먼로는 매디슨에게 정박한 미 군함을 전투에 발진하는 전략을 제안했다. 1814년 매디슨은 미국의 수도 워싱턴을 지키지 못해 영군이 불바다를 만들게 한 잔 암스트롱 국방장관을 경질시키고 먼로를 국방장관에 임명하였다.

국무장관 후임자가 임명될 때까지 먼로는 국무장관직과 국방장관직을 겸직하였다. 먼로는 명장 앤드루 잭슨을 재정적으로 도와주고 뉴오얼린스 지역을 방위하게 하였다. 중앙은행을 통해 국채를 발행하여 군인봉급을 올리고 10만명의 대군을 징집하여 영군과 대적하게 만들어 1814년 말 영국은 미국과 겐트 평화조약을 맺게 되었다.

 

미 대선 출마(1816년)

혁혁한 공을 세워온 먼로는 1816년 대선출마로 민주공화당으로부터 큰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당내 중앙은행을 부정하는 남부 당원들은 윌리엄 크러포드를 지지하였다. 자신을 평가한 크러포드가 먼로를 지지하게 되어 먼로는 당의 대선후보가 되었다.

인기를 잃어가는 연방당은 루퍼스 킹을 내세웠지만 먼로는 217명의 선거인단 중 183의 다수 득표로 68.2% 지지를 받고 부통령 후보 대니얼 탐킨스와 함께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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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환
94129
63048
2022-02-24
미합중국의 건국국부들(27)-제임스 먼로(1)

 

 

 

성장교육

미 건국국부의 마지막 대통령으로 알려진 제임스 먼로는 1758년 버지니아주 웨스트모얼렌드카운티의 먼로 홀에서 스캇트랜드계의 농장주인 부친 스펜스 먼로와 모친 엘리자베스 존스의 두 번째 첫아들로 태어났다. 11살 된 제임스는 농장 일을 돌봐야 하기 때문에 1년에 11주만 켐벌타운 학교를 다니면서 공부해야 했다.

불행하게도 1772년 모친이 사망하고 2년 후 부친이 사망했다. 16세의 고아가 된 제임스는 학업을 중단하고 누이를 비롯한 동생들과 농장을 돌봐야 했다. 다행히 변호사인 조세프 존스 외삼촌이 5형제의 대부가 되어 양육을 맡게 되었다.

버지니아주 지역대표의원인 존스는 제임스를 버지니아주 윌리엄스버그로 거처를 옮겨 윌리엄 앤드 메어리 대학에 진학시켰고 토마스 제퍼슨, 패츠릭 헨리, 조오지 워싱턴을 소개했다.

 

미 독립전쟁 참전

1776년 초 먼로는 학업을 중단하고 미 연합군에서 훈련을 받고 소위로 임관하여 12월 26일 700명의 보병을 이끌고 워싱턴 총사령관의 트렌튼 전투에 가담하여 기습공격으로 공을 세웠다. 전투에서 동맥파열을 일으켜 생명을 겨우 건진 먼로는 워싱턴으로부터 혁혁한 공을 인정받아 대위로 승진하였다.

1777년 말 전투에서 계속 밀린 워싱턴 주력부대가 영군의 전투영역에서 떨어진 펜실바니아 외각 벨리 포오지 진영에서 겨울을 지내며 맹훈련을 할 때 먼로는 미 독립군 역사상 가장 힘들었던 고난을 함께했다.

만머스 전투 후 생활보장이 되지 않는 봉급으로 버틸 수 없어 먼로는 삼촌 대부에게 돌아와 법학을 계속 공부하다가 영군의 남부공세로 위협을 받는 독립군에 재 입대하였다.

제퍼슨의 결정으로 먼로는 민병대 대령으로 임관되었으나 민병을 일으킬 자금이 없어 워싱턴 주력부대와 민병대간의 통신망을 구축하여 전령업무를 맡았다. 먼로는 워싱턴군과 프랑스연합군이 미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던 요크타운전투에 가담을 못하는 안타까움을 달래야 했다.

먼로는 미 독립전쟁 참전용사들의 모임단체인 소사이어티 오브 신시내티 회원으로 등록되어 있다.

 

변호사 및 정치입문

먼로는 1783년 법과에 복학한 후 제퍼슨 밑에서 법학을 이수하고 버지니아주 프레드릭버그에서 변호사 개업을 하였고 농장을 정리한 후 변호사업과 정치에 몰두했다. 1786년 먼로는 엘리자베스 코트라잇(1768-1830)과 결혼을 하고 버지니아주 샬롯트빌에 정착을 하고 세 자녀를 낳았다.

1782년 이후 먼로는 버지니아주의 정치에 입문하여 버지니아주 대표로 활약했다. 1789년 조오지 워싱턴 초대 대통령이 이끄는 미합중국 상원에 출마했다가 제임스 매디슨에게 참패 당하고 버지니아주로 돌아와 변호사업을 계속하던 중 1790년 보궐선거로 연방 상원에 당선되었다.

1790년 해밀턴은 연방당을 세우고 제퍼슨은 민주공화당을 세워 심한 대립을 일으켜 워싱턴 내각이 2개의 정당으로 분리되었다. 워싱턴은 무소속이었지만 주로 해밀턴의 정책을 따랐다.

먼로는 언제나 제퍼슨을 따라 민주공화당 당원이 되어 활약하며 해밀턴과 의견충돌을 일으켰다. 1794년 워싱턴은 영국과 프랑스와 전쟁을 피하기 위해 먼로를 프랑스에, 잔 제이를 영국에 파견하여 양국과 유대관계를 맺게 하였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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