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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환의 생활경제칼럼

유동환의 생활경제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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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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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22
세계 속의 미합중국 대통령-제임스 뷰캐넌(3)

 

 

 

라저 브룩 태니의 흉상 철거(2022)

미 헌정상 최악의 판결을 낸지 165년이 지난 2022년 12월 15일 미 의회는 1857년 드레드 스캇 판결(지난주 칼럼 참조)의 주인공 라저 브룩 태니 전 대법원장의 흉상을 의사당 전시실에서 45일 내에 철거하기로 결정했다.

태니의 흉상자리에는 1967년부터 1991년까지 최초로 흑인 미연방 대법관을 지낸 써굿 마샬(1908-1993)의 흉상을 2년 안에 세우기로 법안을 통과시켰다.

2020년 미니애폴리스에서 경찰관들이 흑인 조오지 플로이드를 무릎으로 숨막혀 죽게 한 끔찍한 사건 이후 흑인들의 항의(Black Lives Matter)로 여론을 받은 미국 각처에서는 노예제도를 고수하고 미 남북전쟁을 일으킨 남부연합의 인종차별 주의자 100여명의 동상이나 기념비를 철거했다.

아직까지 인종차별 대통령들은 철거대상에서 제외되었지만 트럼프가 그의 범죄로 형사판결을 받게 된다면 미래에 거의 신성시되다시피 하는 전직 대통령 대우가 바뀔 수도 있다고 본다.

 

1858년 중간선거(1858)

뷰캐넌은 캔서스 지역을 노예허가 지역으로 법안을 통과시키려고 여러가지 편법을 썼지만 주민들의 반발로 무산되었다. 또한 캔서스 지역의 노예제도를 주민들의 결정에 맡기자는 스티븐 더글라스 상원의 북부 민주당파와 의회의 승인을 받고 노예주로 승격시키자는 뷰캐넌의 남부민주당 파로 민주당이 분열되었다

이 분열로 득을 본 공화당은 중간선거에서 하원을 장악하게 되어 뷰캐넌의 법안 청원을 계속 기각시킬 수 있었고, 1860년 대선에서 에이브러햄 링컨이 16대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었다.

 

국제정책(1857-1860)

뷰캐넌은 취임 후 멕시코와 쿠바를 영입하려 했으나 미 하원에 의해 저지당하였다. 그는 알라스카 지역을 구입하여 몰몬교단을 이주시키려 했으나 가격이 맞지 않아 포기했다.

뷰캐넌은 1850년에 영국과 서명한 클레턴-불워 조약을 1859년부터 1860년까지 수정하여 영국이 혼듀라스와 니카라구아를 미국의 보호지역으로 넘기게 하고 미국의 동의 없이 영국이 중남미 지역을 통제하거나 간섭을 못하게 했다. 뷰캐넌은 대서양 연안을 통제하는 막강한 미 해군력의 과시로 영국의 동의를 쉽게 얻어낼 수 있었다.

 

연방탈퇴(1860-1861)

1860년 11월 6일 링컨이 미합중국 16대 대통령에 당선된 후 남부 노예주들은 연방탈퇴 준비로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이에 압력을 받은 뷰캐넌은 12월 10일 의회에서 연방정부는 남부주들의 연방탈퇴를 허락하지 않는다는 연설을 하며 북부가 남부의 노예제도를 간섭하기 때문에 연방탈퇴를 야기한다고 북을 비난하여 남과 북의 양쪽 모두의 호응을 받지 못했다.

연방탈퇴보다 노예주와 반노예주가 평화적인 협상타협으로 도망자 노예법을 강화해야 된다고 비현실적인 연설을 하여 12월 20일 사우스 캐럴리나주가 연방탈퇴를 감행했다.

뷰캐넌은 제퍼슨 데이비스와 사우스 캐럴리나 대표들을 만나고 도망자 노예법을 강화하는 헌법수정을 상정하겠다고 연방탈퇴 방지에 노력을 가했지만 실효를 거두지 못했고 1861년 1월 초에 6개의 노예제도주가 연방탈퇴에 가담했다.

당황한 뷰캐넌은 사우스 캐럴리나주 섬터 연방요새에 250명의 연방보급군을 보냈으나 연방 해군의 지원사격을 보내지 않아 연방보급군은 사우스 캐럴리나주 의용군의 공격을 받고 후퇴하였다.

3월 3일 뷰캐넌은 섬터 요새를 수비하는 앤더슨으로부터 보급이 떨어졌다는 전보를 받고 3월 4일 링컨 신임 대통령 취임식이 끝난 후 대통령직을 마감했다.

 

은퇴생활(1861-1867)

1861년 4월 12일 남북전쟁이 유발하자 뷰캐넌은 링컨의 연방정책을 지원했고 전쟁을 도발한 남부연합을 처벌해야 된다고 정치인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리고 자신의 고향인 펜실바니아 주민들에게 의용군에 가입하여 연방정부를 위해 참전하라고 동기를 부여했다.

그는 남북양쪽의 신랄한 공격대상이 되어 생명위협도 받고 이로 인한 우울증으로 괴로운 독신 은퇴생활을 영위했다.

 

사망(1868)

1866년에 뷰캐넌은 자서전을 출판하고 끊임없는 정치적 변명으로 하루 하루를 보내다가 1868년 5월 감기에 걸려 고생했고 1868년 6월 1일 기관질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77세의 나이로 사망한 뷰캐넌은 랭카스터 우드워드 힐 묘지에 안장되었다.

 

Doughface

역사학자들은 뷰캐넌과 피어스를 미 남북전쟁을 일으키게 한 장본인들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그들은 북부 민주당에 본적을 두고 남부 노예주에 굽실거리는 정책으로 남부가 연방 탈퇴할 시간과 힘을 키워주었다. 역사학자들은 그들이 카리스마 부족으로 줏대가 없어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 및 결정을 못하고 비겁한 임기응변으로 위기를 모면하여 밀가루 반죽 같은 얼굴을 가졌다고 비유한다.

They have doughfaces. 뷰캐넌은 연방의 막강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갖고도 가난하고 군사력이 거의 없는 남부의 반란을 무력으로 제압하지 못했다. 그는 그들의 요청을 받아주어야만 연방탈퇴를 방지할 수 있고 평화적인 통합으로 연방을 유지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로 인해 약 120만명의 희생자를 낸 미 남북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다.

 

 

 

donyoo
유동환
101777
63031
2022-12-15
세계 속의 미합중국 제15대 대통령-제임스 뷰캐넌(2)

 

 

 

이루지 못한 결혼(1819)

1818년 27세의 뷰캐넌은 랭카스터 무도회에서 철강부호로 알려진 라버트 콜맨의 22세 된 딸 앤 캐럴린을 소개받았다. 1796년 10월 18일 펜실바니아주 랭카스터에서 태어난 아름다운 앤은 수줍어하였고 둘은 첫눈에 반해 1919년 약혼에 이르렀다.

 

그러나 자주 만나야 할 때에 뷰캐넌은 1819년 공황으로 바빠지는 변호사업으로 몇 주에 한번 만나게 되어 주위 사람들은 뷰캐넌이 다른 여자들과 만난다느니 뷰캐넌은 진정한 사랑보다 앤의 재산에 관심이 있다느니 하는 헛소문을 퍼트렸다. 민감한 앤은 뷰캐넌에게 편지로 뜬소문 소식을 알리고 다툼 끝에 앤은 파혼하고 펜실바니아주 필라델피아 친척집으로 갔다.

 

그리고 얼마 안되어 12월 9일 필라델피아에서 사망했다. 임종을 지켜보던 챕맨 의사는 히스테릭한 쇼크로 사망했을 것이라고 추측했지만 앤은 아편이 들어간 처방약 섭취로 사망했다는 기록을 남겼다.

 

앤의 죽음을 슬퍼하며 뷰캐넌은 ‘세상에 오직 하나인 나의 사랑이 나를 버리고 떠나니 세상이 나를 버렸네, 나의 행복은 영원히 앤과 함께 무덤에서 지내리’라는 애타는 심정을 표현했다.

 

앤 부친은 뷰캐넌의 앤 장례식 참석을 거부했다. 콜맨가족은 뷰캐넌 때문에 앤이 죽었다고 비난하였고 뷰캐넌은 그 후 앤을 그리워하며 평생 독신으로 지냈다.

 

그러나 말 많은 미국 정계에서는 그가 윌리엄 루퍼스 킹 전 부통령과 동생연애를 했다느니, 무성애로 섹스에 감각이 없다느니, 포크스 대통령 미망인과 밀애를 했다느니 등등 확인되지 않은 소문들이 퍼졌다.

 

대통령 취임식(1857)

1857년 3월 4일 독신으로 취임식에 선서한 뷰캐넌은 대통령 1임을 약속하고 미의회가 노예제도에 대한 입법을 삼가하게 하고 연방에 등록된 노예주와 반 노예주를 제외한 여러 지역은 노예제도를 지방 자치제 결정권으로 위임했다.

 

그리고 피어스 전직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도망자노예법을 시행하는 것은 미 헌법에 의한 개인 재산보호법에 따라 흑인노예를 가축과 같은 개인 재산으로 취급하는 것으로 강조했다.

취임 후 백악관 예우접대는 고아로 자란 해리엣 레인 질녀에게 위임했다.

 

드레드 스캇 소송 케이스(1846-1857)

1799년경에 버지니아주에서 노예로 태어난 드레드 스캇은 1830년 미저리주 세인트 루이스에서 잔 에머슨 군의관에게 팔렸고 1836년 에머슨을 따라 위스칸슨 지역으로 이주하여 헤리엣 라빈슨과 결혼한 후 지역법에 의해 자유인이 되었다.

 

1843년 에머슨이 사망한 후 딸까지 둔 스캇 가족은 에머슨의 부인 이렌 에머슨 미망인의 노예취급을 받고 미망인은 스캇의 노임을 착취했다. 스캇은 돈을 주고 자신의 노예신분을 획득하려 했으나 미망인은 허락하지 않았다.

 

1846년 스캇은 세인트 루이스 법원에 이렌 에머슨을 고소하여 자유를 얻으려고 했으나 패소했고, 1847년 미저리주 대법원까지 갔으나 5년이 지나면서 1852년 패소했다.

1853년 스캇은 연방법원에 항소를 계속하여 1856년 연방대법원까지 판결이 올라갔다.

 

1857년 취임식을 바로 앞에 둔 뷰캐넌은 잔 캐트런과 라버트 쿠퍼 대법원 판사들에게 압력을 가해 취임식 이틀 후 1857년 3월 6일 라저 태니 대법원장이 이끄는 연방 대법원은 노예는 자유인이라도 미국 시민이 아니기 때문에 대법원의 유리한 판결을 받을 수 없다며 7대2로 스캇 가족에게 노예유지 판결을 내렸다.

 

그들은 1865년 남북전쟁이 끝날 때까지 미 헌정사상 가장 수치적이고 최악의 대법원 판결로 알려진 역사적 희생이 되었다.

 

반 인륜적인 드레드 스캇 판결의 부당함을 느낀 에이브러햄 링컨은 1858년 9월 일리노이 연설에서 미래의 판결은 국민이 결정할 것이라고 민주주의 원칙에 의한 대법원 판결을 예상했다.

 

1957년 공황(1857-1861)

캘리포니아 골드 러시(1848-1855)로 미 서부개척이 활성화되어 금과 호환성 있는 지폐가 남발되고 철도사업이 절정에 이르렀으나 금이 고갈되면서 은행들이 긴장을 하게 되었다.

 

1857년 이와 때를 같이 하여 드레드 스캇 판결을 결정한 태니 대법원장이 미저리 협정이 위헌이라고 결정하면서 36.5도 이북의 반 노예주들의 서부개척이 움츠러들고 철도회사 주식이 폭락하면서 뱅크런으로 이어져 140개의 주 은행들이 문을 닫고 5000개의 사업체들이 파산을 하여 실업률이 올라가 미국은 공황을 맞게 되었다.

 

공황 소식은 1844년 새뮤얼 모스 전보에 의해 미 전지역으로 빠르게 전파되었다. 1859년 공황이 평준화되면서 뷰캐넌은 주은행들이 지폐보다 금전이나 은전 거래하기를 종용하고 금화와 지폐를 3:1의 가치비율로 정해 지폐 남발을 방지했다.

 

1861년까지 공황의 여파가 지속되면서 공업경영의 타격을 받은 북부와 농업으로 타격을 덜 받은 남부와 적대의 골이 깊어졌다.

 

유타 분쟁(1857-1858)

1857년 5월 뷰캐넌은 유타 지역에 몰몬교라고 불리는 예수 그리스도 후기성도 교회와 일반 개척자들과의 분쟁을 진압할 목적으로 무장한 미 육군 탐험대를 보냈다. 몰몬교단은 브리겜 영 전 주지사가 이끌고 있었다.

 

1857년 9월 몰몬교단은 새로 영입되는 개척자들 중 몰몬교의 초대지도자를 살해했다는 루머를 듣고 대량 살상을 감행했고 미군은 이에 따라 몰몬교단에 공격을 시작했다.

 

몰몬 교단은 무장을 하고 솔트 레이크 호수에 대치하며 전면적인 전투를 피하고 미군의 보급망을 차단했다.

 

미 육군은 월동준비가 되지 않아 일단 후퇴를 하고 이듬해 1858년 뷰캐넌은 평화적인 타협을 통해 대량 학살한 주범들을 교수형에 처하고 주지사를 유타 지역에 보내 통치하게 하였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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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환
101584
63031
2022-12-08
세계 속의 미합중국 제15대 대통령-제임스 뷰캐넌(1)

 

 

 

영어이름: James Buchanan

출생: 1791년 4월 23일, 펜실바니아주 코브 갭

사망: 1868년 6월 1일 77세, 펜실바니아주 랭카스터

부친: 제임스 뷰캐넌 시니어, 펜실바니아 부호

특성: 평생 독신

대통령 순위 및 임기연도: 15대, 1857년 3월 4일- 1861년 3월 4일

역대 대통령 평가순위: 트럼프(44/44) 제외하고 최악의 미 대통령 43/44

소속정당: 연방당(1814-1824), 민주공화당(1824-1828), 민주당(1828-1868)

임기 중 인구증가: 2,929만명에서 3,221만명

       GDP 증가: $41억8천만에서 $46억4천300만 

       1인당 GDP 증가: $1,427에서 $1,441

업적: 미 해군력 과시로 영국 중남미 점거 방지

인용구: 옳다고 해서 실행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성장기간(1791-1814)

제임스 뷰캐넌은 1791년 4월 23일 펜실바니아주 코브 갭 통나무집에서 부친 제임스 시니어 뷰캐넌(1761-1821)과 모친 엘리자베스 스피어(1767-1833) 사이의 11자녀들 중 둘째로 태어났다.

제임스가 태어난 해 부친은 머세스버그에 자리잡은 농장으로 이사를 하고 농업, 상업, 부동산 투자로 성공하여 부호가 되었다.

제임스는 1809년 디킨슨 대학을 졸업하고 랭카스터에서 제임스 홉킨스 변호사 사무실에서 변호사 연수를 받고 1812년 펜실바니아주 변호사자격증을 획득했다.

그는 유능한 변호사가 되어 1821년 그의 연 수입은 1만 1천달러가 되었다. 그 당시 평균 하루 노임 수당이 90센트였다. 365일 노동을 해도 노임은 연 330불도 안되었다.

 

군복무 및 정치입문(1814-1815)

뷰캐넌은 1812년 전쟁이 발발한지 2년 후에 펜실바니아 의용군 사병으로 입대하여 소총부대원으로 볼티모어 수비작전에 참전했다. 그는 미 대통령 중 유일한 사병의 경력을 갖고 있다.    

동년 뷰캐넌은 정치에 관심을 갖고 연방당원으로 펜실바니아 주의원에 당선되어 연방은행제도와 고관세 정책을 지지했다.

 

중견정치인(1815-1857)

1820년 뷰캐넌은 펜실바니아주 대표로 미 연방하원에 입성하였다. 1824년 연방당이 와해되면서 뷰캐넌은 민주공화당 대선후보인 앤드루 잭슨을 지지하였다. 1828년에도 뷰캐넌은 잭슨을 지지하여 잭슨이 대선에 압도적인 승리하면서 창당한 민주당 소속이 되었다.

 

1832년 재선에 당선된 잭슨은 뷰캐넌에게 주러시아 미대사직을 부탁했다. 처음엔 망설이다 수락을 한 뷰캐넌은 18개월간 러시아에 머물면서 불어도 익히고 외교능력을 과시하여 러시아와 무역 및 해양관계에 대한 조약을 맺었다.

 

미국에 돌아온 뷰캐넌은 펜실바니아 대표 미연방상원에 입성하여 3선에 당선되었고 잭슨의 민주당 정책을 따라 연방은행 재설립을 반대하였다.

민주당에 소속되면서 뷰캐넌은 정치사상을 180도 바꾸고 노예제도에 언급을 피하고 서부개척에 필요한 노예제도는 주정부 관할로 위임해야 된다고 주장하여 남부의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1844년 5월 27일부터 30일까지 볼티모어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에 대선후보로 지명 받으려 했으나 제임스 포크에게 밀려 탈락되었다.

1845년부터 1849년까지 뷰캐넌은 포크내각의 국무장관직을 수락하여 오레건 협약과 구아달루프 조약을 맺어 포크의 미 합중국 영토확장을 도왔다.

 

 1848년 5월 22일부터 25일까지 볼티모어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대선 후보로 참가했으나 루이스 캐스에게 참패 당했다. 그 후 정계를 떠나 랑캐스터로 돌아와 프랭클린 마샬 칼리지 대학장을 지내며 조용히 1852년 대선 선거운동을 시작했다.

 

1852년 6월 1일부터 5일까지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뷰캐넌은 다수의 표를 유지했으나 2/3의 지지를 받지 못해 계속적인 지명투표로 이어지다 프랭클린 피어스에게 양보하였다.

뷰캐넌은 피어스 14대 대통령의 제의로 1853년부터 3년간 주영국 미대사직을 맡고 클래런든 영국 외무장관을 만나 영국의 중남미 진출을 방지하는 압력을 불어넣었다.

 

1854년 뷰캐넌은 자신은 반대했지만 피어스의 지시에 의해 재정난에 허덕이는 스페인에게 쿠바 매도요청을 했다. 만일 스페인이 거절하면 다른 수단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는 오스텐드 메니페스트 요구서는 스페인에서 받아들이지 않았고 미국 내에서 특히 북부지역의 비난을 받게 되어 쿠바매입 계획은 무산되었다.

 

1856년 대선(1856)

1856년 6월 2일부터 6일까지 신시내티에서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에 대선후보지명을 위해 참가한 뷰캐넌은 인기를 잃은 피어스 14대 대통령과 스티븐 더글라스, 루이스 캐스를 누르고 17번째 지명투표에서 296표의 만장일치로 잔 브레킨리지 러닝 메이트와 함께 민주당 대선 후보로 지명되었다.

 

1856년 대선 유세에서 뷰캐넌은 모르쇄당의 밀라드 필모어 13대 전 대통령과 공화당의 잔 프레만트 대선후보들과 경선을 했다. 뷰캐넌은 주로 편지를 사용하여 유세를 했다. 그는 공화당이 노예문제로 지역감정을 일으켜 남과 북을 가른다고 비난하며 자신은 남북통합을 위한 평화적인 연방정책을 세운다는 선거유세를 강조했다.

 

1856년 11월 4일 대선결과에서 뷰캐넌은 296개의 선거인단 중 174표로 45%의 선거인 지지를 받아 114표로 33.1 %의 지지를 받은 프레만트를 누르고 15대 대통령이 되었다.

 

뷰캐넌은 현실성이 없는 평화통일과 비슷한 평화통합 구호로 당선되었다. 피어스의 실책으로 미연방은 이미 남과 북이 분열되어 가는 중이었다. 그는 말도 안 되는 평화와 통합 합성어를 만들어 평화를 선호하는 민심을 얻어 당선되었고 미국을 피바다로 만든 남북전쟁을 초래하게 만들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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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환
101394
63031
2022-12-01
세계 속의 미합중국 14대 대통령-프랭클린 피어스(3)

 

 

 

 

미 합중국 횡단 철도

피어스는 연방정부의 인프라 정책을 반대하는 민주당 정책을 따르지 않고 1853년 제퍼슨 데이비스(1808-1889) 국방장관을 임명하여 미래 합중국 철도망을 건설하기 위한 준비작업으로 지형측정의 임무를 맡겼다. 데이비스는 미군 공병대를 동원하여 지형측정도를 만들었고 제임스 게스든 철도사업가를 피어스에게 소개하여 남부철도횡단 철도에 필요한 토지를 멕시코로부터 구입하게 하였다.

 

피어스로부터 멕시코 대사임명을 받은 게스든은 1853년 12월 30일 멕시코 시에서 안토니오 샌타나 멕시코 대통령과 회담을 하여 아리조나주 서남부와 뉴 멕시코 남부의 76,000 평방 KM의 토지를 1천5백만 달러에 구입하는 토지구입 요청서를 냈으나 회담진행 중 미 의회는 구매가격 5백만 달러를 줄여 1천만 달러의 예산을 책정했다.

 

미국과 멕시코전쟁으로 재정난을 겪고 있던 샌타나는 1854년 6월 8일 책정된 토지를 1천만달러로 매도하는 게스든 구입협약에 서명하였다.

후에 미국 철도의 아버지 찰스 크로커(1822-1888)는 1869년 유니온 패시픽 철도회사와 센트럴 패시픽 철도회사의 철도를 연결하여 시카고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연결하는 첫 번째 미합중국 횡단 철도를 완공했고, 남부 패시픽 철도회사를 구입하여 1883년 뉴오얼린스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두 번째로 횡단철도를 완공했다.

 

동서남북을 잇는 횡단철도가 거미줄같이 연결되면서 19세기를 넘어 20세기에 미합중국 경제가 대 약진하였다.

피어스의 철도사업계획은 후에 경제대국으로 패권을 잡게 된 미합중국 경제개발에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 풍부한 자원을 찾아 사람이 모이면 잠용같은 사업가들이 기업을 일으킬 수 있는 기본조건이 교통수단이기 때문이다.

 

1차 대전 이후 아돌프 히틀러가 건설한 독일의 아우토반이 2차 대전 이후 폐허에서 1948년 독일 라인강의 기적을 일으키게 하였다. 1964년 독일 방문 시 독일 고속도로를 통찰하고 감명을 크게 받은 박정희 경제국부가 1970년 2년 5개월 만에 완공한 경부고속도로가 한강의 기적을 일으키게 했다. 중국도 한국을 모방하여 전국에 고속도로를 건설하여 경제를 크게 일으키고 있다.

 


페리원정(1853-1854)

1852년 11월 필모어 전 대통령이 시행한 페리원정 정책을 적극적으로 지향하여 피어스는 일본과 국교 및 통상조약을 맺었다.

 


켄서스-네브라스카 법(1854)

피어스의 대륙횡단 철도 계획은 켄서스 네브라스카 미 서부지역을 연결시키는 수천 개의 농장을 개발하고 캘리포니아 금광개발로 산업을 일으키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러나 이 지역은 위도 36도 30분 이북을 차지하고 있어 1850년 미저리협약에 의해 반 노예지역으로 협정되었다. 노예를 수용해야 하는 남부농장주들에게는 관심 밖의 지역이었다.

 

남부농장주들의 농토개발 관심을 이끌기 위해 스티븐 더글라스 민주당 상원의원은 켄서스와 네브라스카 지역에서 주민들이 자치적으로 노예제도를 결정하게 하는 켄서스-네브라스카법을 상정하여 1854년 5월 30일 피어스의 서명으로 실효되었다.

이로 인해 켄서스지역은 남부의 노예제도와 북부의 반 노예제도를 주장하는 주민들의 무장 충돌로 인해 피로 물들어 피흘리는 켄서스(Bleeding Kensas)가 되었다.

 

이 법을 반대하는 위그당원들과 반 노예제도를 선호하는 북부 민주당원들은 1854년 3월 2일 공화당을 창당하여 반 노예제도 및 노예해방에 앞섰다. 이 법은 곧 발발하게 될 남북전쟁의 불씨가 되었다.

 


1856년 대선 경선(1856)

1856년 6월 1일부터 6일간 열린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피어스는 자신이 차기 대통령 후보로 지명될 것으로 예상했지만 켄서스-네브라스카법 통과와 도망자 노예법 시행으로 북부 민주당의 인기를 잃어 그의 추측을 벗어나게 만들었다.

첫날 경선에서 122표로 135표를 받은 뷰케난에게 밀리다가 더글라스 후보가 뷰케넌을 지지하면서 피어스는 16번째 경선에서 탈락되고 17번째 뷰케넌이 296표의 만장 일치로 지명되어 1856년 11월 4일 15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은퇴(1857-1868)

피어스는 1857년 3월 4일 백악관을 떠난 후 뉴 햄프셔주 포츠머스로 이사하여 부동산에 투자를 하고 부인과 3년간 유럽여행을 즐겼다.

1860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피어스는 당내 통합을 강조했으나 민주당 분열로 에이브러햄 링컨 공화당 후보가 16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미 남북전쟁이 발발하자 피어스는 링컨을 맹렬하게 비난했다. 그는 미 연방은 전쟁대신 남부의 노예제도를 수용하여 노예제도 2원제를 유지해야 된다는 비현실적인 정치이념을 갖고 있었다.

1863년 12월 2일 허약한 부인 제인이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막내아들 사망 후 슬픔의 그늘로 살았던 제인은 콩코드 가족묘지에 안장되었다.

 


사망(1869)

독신이 된 피어스는 폭주로 외로움을 달래고 끝내 건강을 해치게 되었다. 부인을 따라 미국성공회로 개신하고 세례를 받았다. 정치에 계속 관심을 갖고 앤드루 잔슨 17대 대통령의 전쟁복구사업을 지지했다.

1869년 여름부터 건강이 악화되어 피어스는 1869년 10월 8일 콩코드 자택에서64세의 나이에 간경화증으로 사망했다. 율리시스 그랜트 18대 대통령은 피어스 장례식을 국장으로 예우하고 그의 시신은 부인 묘 옆에 안장되었다.

 

 

 

 

donyoo
유동환
100990
63031
2022-11-17
세계 속의 미합중국 14대 대통령-프랭클린 피어스(2)

 

 

1852년 대선(1852)

1848년 고향으로 돌아온 피어스는 변호사 사업에 몰두했다. 그러나 뉴 햄프셔 민주당 당원들은 피어스를 1852년 민주당 대선후보에 추천했다. 처음에는 사양했지만 계속적인 추천으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1852년 6월 1일부터 5일까지 볼티모어에서 열리는 민주당 전당대회에 대선후보로 조용히 등록했다.

 

민주당은 노예문제로 후보자들의 지지자들이 분열되어 더글라스, 케스, 마시, 뷰캐넌, 휴스턴, 벤튼 같은 기라성 후보들이 경선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10년간 부인의 요구로 정계를 떠났던 피어스는 서부 노예주 팽창과 도망자 노예법 실행을 강조하여 시선을 끌었다.

 

6월 3일 첫 번째 경선에서 288표 중 케스가 116 뷰케넌이 93표로 리드했지만 과반수 표를 얻지 못해 계속 34번이나 경선을 치르면서 지명자를 선출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38번째 경선에서 펜실바니아주 출신 뷰캐넌이 다른 소수 후보자를 몰아 한 표도 얻지 못한 피어슨을 지지하게 되어 피어스는 몰표를 받게 되었고 승승장구로 49번째 경선에서 282개의 지지표를 받고 윌리엄 킹을 러닝메이트로 민주당 대선 후보에 지명되었다.

 

얼떨결에 다크호스로 대선후보에 오른 피어스의 소식은 고향에 있는 제인에게 알려졌고, 제인은 남편의 약속 배반에 충격을 받아 약한 몸으로 혼절하였다.

 

위그당은 스캇 장군과 그레함을 러닝 메이트로 지명했지만 심한 당내 분열로 위그당을 지지했던 투표자들의 계속적인 이탈이 시작되었다.

이를 좌시한 피어스는 민주당 지지표를 단합하기 위해 일체 유세를 하지 않고 말로 무덤을 파는 스캇의 공격적인 유세를 관찰하였다.

 

1882년 11월 2일 선거결과에서 피어스는 296개의 선거인단 중 254개의 표를 받고 300만명의 투표자 중 50.9%의 지지를 받아 미 14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멕시코전쟁터에서 피어스의 상관이었던 스캇은 42개의 선거인단표를 받고 44.1%의 지지율로 패배하였다. 

 

피어스 가족의 비극(1853)

대통령에 당선된 피어스는 부인 제인과 11살 아들 벤자민과 함께 매사추세츠주 앤도버에 거주하는 제인의 형부인 잔 에이킨스 집에서 크리스마스를 지내고 1853년 1월 6일 기차로 고향을 향하고 있었다. 콩코드에 도착하면 3월 4일 대통령 취임식에 맞추어 워싱턴 DC로 이사를 할 예정이었다.

 

1시15분 기차가 시속 40Km의 속도로 앤도버에서 5Km 지점을 지날 때 철도에 놓여있는 돌에 부딪쳐 꽁꽁 얼어붙은 차축이 충격을 받고 쪼개지면서 피어스 가족이 탄 승객 칸이 탈선을 하여 20피트 거리의 비탈진 강둑으로 성냥갑 같이 뒹굴러 떨어졌다.

 

아들 벤자민은 부모들이 보는 앞에서 객차 사이를 왔다 갔다 하다가 창문 밖을 보고 있었다. 벤자민은 기차가 구르는 충격으로 떨어진 각목에 머리를 맞아 즉사했다. 이 광경을 지켜본 피어스는 달려가 목뼈가 부러지고 목살이 피범벅이 된 아들을 붙잡고 울부짖는 부인과 함께 하늘이 깜깜하게 내려앉는 충격을 감수해야 했다. 승객 60명 중 많은 부상자 외에 사망자는 벤자민 1명뿐이었다.

 

벤자민 시신은 에이킨스 집으로 후송되어 12명의 학급친구들이 달려와 운구를 들고 장례를 치렀다. 그리고 콩코드가족묘지에 안장되었다. 제인은 영특하고 착한 아들의 오싹한 마지막 광경이 악몽으로 떠올라 비통에 허덕이며 장례식과 안장식에 참여를 하지 않았다. 정신이 혼미하다가 현실에 부딪치면 남편의 대통령 당선으로 신이 벌을 내렸다고, 위로 해주는 친구들에게 말했다.

 

정신이 나면서 제인은 아들에게 엄마의 잘못을 용서해 달라는 장문의 편지를 올렸다. 이로 인해 열차사고에서 소생한 피어스 부부는 몇 년 사이로 사망한 두 아들을 포함하여 아들 3을 모두 잃어버리는 비통함을 우울증으로 평생 간직해야 했다.

 

피어스는 제인과 함께 아들의 죽음을 가장 슬퍼하면서 노예해방 반대, 노예주 증가, 노예가 도망가다 잡혀 린치는 물론 살아서 맹견에게 갈기갈기 찢어 죽게도 하는 도망자 노예법을 시행하여 역사학자들은 피어스를 미 대통령 44명중 40번째 순위로 그의 업적을 평가한다.

소생한 승객들은 철도회사를 고소했지만 제인은 집단고소에 불참했다.

 

대통령 취임식(1853)

1853년 3월 4일 14대 대통령 취임식에 비극을 맞은 피어스 신임 대통령을 위로하기 위해 사상 초유로 2만명 이상의 군중이 모였다. 피어스는 법전서에 손을 얹고 선서를 했다. 잔 쿠인지 애덤스 이후 2번째로 성경대신 법전서를 선택했다. 그는 원문 없이 기억으로 취임연설을 하며 미국의 남북통합으로 국내경제를 활성화시키고 미국의 이득을 위한 국제관계를 주장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군중에게 ‘국민 여러분은 약점투성이인 저를 선택하셨습니다. 여러분의 강점으로 저의 임무를 완수하게 해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끝을 맺어 위문 온 군중들의 환호를 받았다.

 

제인은 선서식은 물론 향후 2년간 모든 백악관 행사에 불참했고, 백악관에서 은둔생활로 자신의 비통함을 달랬다. (다음 호에 계속)

 

 

 

donyoo
유동환
100755
63031
2022-11-10
세계 속의 미합중국 대통령(29)-프랭클린 피어스(1)

 

 


영어이름: Franklin Pierce

출생: 1804년 11월 23일 뉴 햄프셔주 힐스보로

사망: 1869년 10월 8일 뉴 햄프셔주 콩코드

부인: 제인 애플턴(1806-1863), 1834년 결혼

부친: 벤자민 피어스 뉴 햄프셔 주지사

특성: 전투경험 없이 정치적으로 준장 승격

대통령 순위 및 임기연도: 14대, 1853년 3월 4일 – 1857년 3월 4일

역대 대통령 평가순위: 40/44

소속정당: 민주당

임기 중 인구 증가: 2591만명에서 2929만명

 GDP 증가: $33억1100만에서 $41억 8천만

 1인당 GDP 증가: $1,277에서 $1,427

업적: 메실라 조약으로 게스든 지역 구입(76,845 평방 KM)

인용구: 시간이 돈이라는 것을 기억하라

 

 

성장기간(1804-1827)

프랭클린 피어스는 1804년 뉴 햄프셔주 힐스보로에서 부친 벤자민 피어스와 모친 애나 케드릭 피어스 사이 7자녀 중 4번째로 태어났다. 뉴 햄프셔 주지사를 지낸 부친은 아들의 교육을 중요시하고 프랭클린이 12살 때 지방학교 기숙사에 보냈다.

집이 그리워진 프랭클린은 어느 일요일 12마일을 걸어서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온 아들을 저녁까지 잘 차려주고 역마차에 태워 학교 기숙사까지 6마일 떨어진 곳에 내려놓고 천둥 번개 치는 저녁날씨에 학교로 걸어가라고 했다. 프랭클린은 후에 부친으로부터 받은 생교육에 자신이 성공하게 되었다고 진술했다.

1824년 프랭클린은 메인주 브런스윅에 위치한 보든대학을 졸업하고 노스 햄프턴 법대에서 법을 공부하여 1827년 뉴 햄프셔 변호사 자격증을 따고 변호사 사무실을 차렸다.

 

정치입문(1828-1833)

프랭클린은 1824년부터 변호사업을 하며 정치에 관심을 두기 시작하여 힐스보로 타운 의원직을 겸했고 1828년 뉴 헴프셔주 하원의원이 되었다.

1831년 27세의 나이에 프랭클린은 앤드루 잭슨의 정책을 강조하여 주지사에 재임하는 부친 벤자민과 함께 뉴 햄프셔의 민주당 스타가 되었다.

1832년 대선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 잭슨의 영향으로 프랭클린은 28세의 나이에 미 하원에 등극하게 되었다.

 

결혼(1834)

1827년 제인 민스 애플턴은 교수의 소개로 프랭클린을 만났으나 제인의 모친은 술을 좋아하고, 교파가 다르고, 노예제도를 추종하는 프랭클린을 받아드리지 않았다.

사실 둘의 성격과 습관은 서로 공통점이 없었다. 그러나 아랑곳없이 둘은 7년간 연애를 하다 프랭클린이 힐스보로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차린 후 1834년 11월 19일 조촐한 결혼식을 올렸다.

제인은 절실한 기독교신자로 금주를 지향했다. 또한 정치적으로 노예제도를 반대하는 위그당을 지지했다. 수줍어하는 성격에 결핵을 앓게 되어 몸이 쇠약했고 남편의 정치활동을 싫어했다. 게다가 첫째 아들은 갓난애기 때 죽고, 둘째 아들은 4살 때 디프테리아로 병사했고, 막내 아들은 11살 때 기차사고로 사망하여 제인은 비운의 국모로 알려졌다

 

중견 정치인(1833-1842)

피어스는 1833년부터 1836년까지 미 하원의원으로 당선되어 노예해방반대, 중앙은행 폐쇄, 연방정부의 인프라 사업반대 등 잭슨의 민주당 정책을 고수했다.

그리고 1836년에 미 상원의원으로 당선되어 1837년부터 1842년까지 6년간 상원직을 맡게 되었다. 1837년 경제공황시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민주당 대변인이 되는 것 외에는 별로 없었다.

1840년 대선 때 그는 밴 뷰런을 밀어줬지만 효과는 미미하게 끝을 맺었다. 그는 1841년 상원의원을 사임하고, 1842년 초 부인과 두 아들이 거주하는 콩코드로 돌아왔다. 다시 변호사업을 번창시키고 부인과 시간을 함께 지냈다.

 

멕시코 전쟁(1846-1848)

포크스 대통령의 검찰총장 임명요구를 피하여 피어스는 1846년 멕시코 전쟁에 자원하여 윈필드 스캇 소장 예하부대에 대령으로 참전하게 되었고, 1847년 준장으로 진급되었다.

미 역사상 민병대 소집 외에는 전투경험 없이 자신의 이미지를 높이기 위해 정치적으로 별을 딴 유일한 장군이 되어 8월초 2500명의 군사를 이끌고 3주간 행군하여 8월 19일 콘테라스 전투에 임하게 되었다.

피어스는 운이 좋지 않아 타던 말이 날뛰게 되어 안장이 사타구니에 충격을 주어 낙마하는 순간 말에 무릎이 깔리어 일어나지 못하자 장병들은 그가 혼절한 줄 알고 나약한 사단장이라고 떠들었다. 다음날 부축을 받으며 전장에 나왔을 때 전투는 이미 미군의 승리로 끝났다.

8월 20일 추루버스코 전투가 시작되면서 피어스는 진두를 맡았으나 전에 받은 부상으로 고통이 심해 혼절하였다. 전투에 승리한 미군은 멕시코시를 포위하고 3개월간 협상 중 피어스는 주로 야전병원 텐트에서 시간을 보냈다.

12월 말 콩코드로 돌아온 피어스는 1848년 전역하였고, 뉴 햄프셔주에서 승전장군으로 환호를 받았지만 그의 실제 전투경험은 조롱거리가 되었다. (다음 호에 계속)

 

 

 

 

donyoo
유동환
100361
63031
2022-10-27
세계 속의 미합중국 대통령(28)-밀라드 필모어(3)

 

 

페리 원정(1853-1854)

1850년 9월 9일 캘리포니아를 미연방 31번째 주로 영입한 필모어는 중국과 교역을 하면서 메니페스트 데스티니정신을 이어받아 조선을 포함한 일본의 아시아지역을 서부 개척지로 선정했다. 그 당시 미국의 고래어선들이 일본 근해에서 고래잡이를 하고 있었고, 일본이 아시아 지역 입구로 선정되어 필모어는 일본과 외교관계를 우선순위에 올렸다.

 

일본막부는 220년간 쇄국정책으로 서양문명을 받아드리지 않고 있었다. 미국은 1790년부터 1853년까지 27차례에 걸쳐 일본과 국교를 맺으려 했으나 번번히 거절당했다.

 

1852년 11월 필모어는 14세부터 해군병이 되어 17세에 소위로 임관하고 1812년전쟁 멕시코전쟁 등으로 공을 세우고 한때 러시아대사직을 지낸 매튜 C 페리(1794-1858) 제독을 일본원정대 해군제독 및 일본대사로 임명하고 일본 막부에게 다음과 같은 친서를 전하게 했다.

 

 ‘미국 대통령인 저는 미 해군의 최고 사령관인 매튜 C 페리제독을 통해 폐하께 이 친서를 보냅니다. 미국은 종교나 정치적인 압력을 배제하고 오로지 일본과 친교 위주로 상업 및 문화를 포함한 국교를 맺고자 합니다. 페리제독은 미국을 대표하여 폐하와 위에 상기한 친선 국교를 위한 협상임무를 갖고 있습니다. 폐하께서 미국의 선박이 석탄과 물을 비롯하여 항해에 필요한 기타 물량공급과 교역을 위한 항구를 개항해주시고 난파로 인한 미 선박 선원의 신변을 보호해 주시면 양국에 서로 도움이 될 것이라 믿습니다. 폐하께서 막강한 해군력을 동원한 페리제독에게 회답을 해주시기를 부탁 드립니다.’

 

1852년 11월 24일 페리는 3척의 증기 군함과 1척의 범선 군함을 이끌고 버지니아주를 떠나 아프리카 서해안을 항해하여 1853년 1월 24일 남아프리카 케이프 타운을 지나 5월 4일 중국 상해항에 도착했다.

 

5월 17일 페리는 2척의 증기 군함과 2척의 범선 군함을 재정비하고 상해를 떠나 5월 26일 류큐왕국의 나하 앞바다에 정박했다.

페리는 류큐왕국의 저항을 무시하고 무장한 병력으로 슈리성까지 진군하여 대통령 친서를 전달했다. 페리는 7월 4일 미 독립일을 기념한다는 명목으로 바다에 함포사격을 가하여 미 해군의 막강한 무력을 과시했고 무작위로 주위 섬들을 돌아다니며 측량했다.

 

페리는 일본에게 개국을 위한 회담을 강요했지만 일본의 막부 도쿠가와 이에도시는 병치레를 하고 있어 1년 후에 회담결정을 하자는 조건으로 7월 17일 홍콩으로 돌아왔다.

7월 27일 도쿠가와 이에도시가 사망하고 병약한 도쿠가와 이에사다가 막부의 대를 이었다.

1854년 2월 13일 페리는 3척의 증기선 군함과 6척의 범선 군함에 1000여명의 해군 해병대를 동원하여 류큐를 통해 우라가에 내항했다.

 

어마어마한 해군시위에 기가 죽은 일본 막부는 3월 31일 필모어의 친서대로 미국의 요구에 순응하고 서방세계의 문명을 받아드려 세계 열강에 오르는 기회를 만들었다.

영국, 프랑스, 러시아 등을 포함한 수많은 유럽 열강 중 잔머리를 굴려 열강 사이의 어부지리를 찾지 않고 미국을 선택한 막부의 결정은 일본민족의 축복이었다.

 

1852년 위그당 대선 전당대회(1852)

1852년 6월 17일부터 3일간 열린 위그당 대선 전당대회에서 1950년 도망자 노예법을 통과시킨 필모어는 남부의 지지를 얻었지만 북부의 강력한 반발로 대선후보를 포기하고 데니얼 웹스터 국무장관을 대선 후보로 지지했다. 불행스럽게 10월 24일 웹스터의 사망으로 윈필드 스캇장군이 공천에 지명되었고 필모어의 대통령 임기는 1853년에 끝나게 되었다.

 

찾아온 비극(1853-1854)

1853년 3월 4일 프랭클린 피어스 14대 미 대통령 취임식에 필모어와 함께 참석한 부인 애비게일은 독감에 걸려 고생하다 3월 30일 폐렴으로 생을 마감했다. 버팔로에 부인을 안장시킨 필모어는 슬픔이 가시기전 1854년 7월 26일 병약한 모친을 도와 18세부터 백악관 내조를 맡았던 32세의 외동딸 메어리가 콜레라로 사망하여 계속적인 비극을 감수해야 했다.

 

1856년 대선(1856)

필모어는 지지자들의 힘을 얻어 1854년 남북대립에 정치적인 개입을 하지 않고 구교와 이민자를 배척하는 모르쇠당을 창당하여 1856년 대선에 출마했다. 1856년 11월 4일 개표에서 총 174개 중 8개의 선거인단 표를 받고 21.6%의 지지율로 낙선했다.

 

재혼(1858)

1858년 2월 10일 멋쟁이 전직대통령으로 알려진 필모어는 부호로 알려진 케럴라인 매킨토시 미망인을 만나 재혼을 하게 되었고, 돈 걱정 없이 자선사업을 하며 은퇴생활을 영위했다.

1860년 선거에 당선된 에이브러햄 링컨의 노예해방과 연방군 동원을 찬성하였고 남북전쟁시 45세 이상으로 구성된 북부 뉴욕주 군대를 지휘하였다.

 

사망(1874)

평생 건강했던 필모어는 1874년 2월 중풍을 맞고 3월 8일 두 번째 중풍으로 사망했다. 링컨의 첫 번째 부통령이었던 해믈린과 상원의원들을 포함한 많은 정치인들이 장례식에 참가하여 애도를 표했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필모어가 미 상원이 올린 1950년 도망자 노예법을 통과시키지 않았다면 미 대통령 평가순위에서 5위 상위권에 들어갔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는 연방군의 군사력을 쓸만한 뚝심과 배짱이 결여된 지도자로 평가되고 있다.

 

 

 

 

donyoo
유동환
100155
63031
2022-10-20
세계 속의 미합중국 대통령(27)-밀라드 필모어(2)

 

 

 

(지난 호에 이어)

 

부통령 재임(1849-1850)

1849년 3월 5일 테일러 대통령과 함께 부통령 취임식을 끝낸 필모어는 테일러의 관심 밖의 인물이 되어 직책은 상원의장 겸직으로 상원 투표의결에 마지막 한 표를 행사하는 것에 제한되었다. 그는 노예제도로 인한 남북의 갈등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정책으로 상원을 이끌어 항상 양측의 찬성과 비난을 받아야 했다.

 

대통령 재임(1850-1853)

1850년 7월 8일 상원의회를 이끌어 가던 필모어는 테일러의 임종직전 소식을 받고 백악관으로 달려가 내각들과 테일러 침실 밖에서 초조하게 밤을 세우고 있었다.

다음날 테일러가 콜레라로 사망하였고 필모어가 1853년 3월 4일까지 대통령직을 맡게 되었으나 테일러의 내각 전원이 사임하여 필모어는 7월 20일 웹스터를 국무장관으로 새로운 내각을 형성했다.

대통령 서거로 혼란한 틈을 타서 뉴 멕시코를 텍사스에 영입하려던 벨 주지사는 필모어가 파견한 연방군에 의해 저지당했다.

테일러 지시에 의해 1850년 1월 29일 클레이는 캘리포니아를 자치주로 영입시키고, 뉴멕시코, 유타 지역을 연방지역으로 만들고 워싱턴 DC에서 노예매매를 금지하고 도망자 노예 법을 입법화하는 포괄법안을 의회에 상정했다.

필모어는 이 포괄법안을 5개로 분리하여 차례대로 1850년 가을까지 모두 통과시켰다.

 

도망자 노예 법(1850)

1619년 홀랜드 해적단이 포르투갈 흑인노예 수송선에서 납치해온 20명의 흑인들을 버지니아주 제임스타운에 풀어 고용계약 경매를 했다. 이들은 유럽의 가난한 농부들을 10년간 고용계약으로 데려오는 것보다 가격이 저렴하고 죽을 때까지 팔던지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노예로 둔갑시켜 미 정착인들의 농업이 활성화되면서 수요가 늘기 시작하였다.

수요에 맞추어 포르투갈인들은 건장한 아프리카인들을 마구잡이로 쇠사슬에 엮어 미정착인들에게 매매했고 17세기를 넘어 18세기로 접어들면서 목화농업이 극치에 이르러 이에 필요한 흑인노예들의 인구는 18세기말 줄잡아 7백만명에 달했고 미국 전체인구의 30%가 넘었다.

이들의 노동력은 백인 농장주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했지만 이들을 인간으로 보지 않고 일하는 가축으로 보는 악덕 주인들은 채찍질, 강간, 성폭행 심지어는 살인을 하는 린치를 감행했다. 가장 가슴 아픈 일은 남녀노소 구분 없이 가족을 뿔뿔이 헤어지게 팔아버리는 것이었다.

이 피를 이어받은 트럼프는 2017년 2,800 불법이민자가족들의 어린애들을 부모와 분리시켰고 이 만행을 찬성하는 공화당 유권자의 표심을 유지하려 했다.

반면에 에이브러햄 링컨은 백인 혼혈아 딸이 경매로 부모와 생이별하는 광경을 보고 노예해방을 결심하게 되었다.

악덕 농장주들의 학대에 못 이겨 반란을 일으킨 예도 있지만 법으로 무기 소지를 못하는 흑인 노예들은 주인으로부터 도망을 시작하였고 이에 미 정부는 1789년 2월 4일 헌법 4조 2항 구절 3에 노예주인들이 도망가는 흑인노예들을 체포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는 1789년 도망자 노예 법을 제정했다.

그러나 도망간 노예들은 누구에게나 자유를 주는 미 북부지방이나 캐나다로 이주하여 노예주인들은 강력한 도망자 노예 법을 요구했다.

남부 주들의 연방 탈퇴를 방지하기 위해 이들의 요구대로 필모어는 다음의 내용을 담은 1850년 도망자 노예 법을 통과시켜 북부 주들의 강력한 반발을 일으키게 되었다.

‘연방정부는 노예제도를 반대하는 북부 주들을 포함한 미 전역에서 도망자 노예들을 체포하여 주인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체포된 도망자들은 배심원 없는 재판을 받게 된다.

도망자 노예들을 은닉하거나 식량이나 옷 등으로 도주를 도와준 사람은 6개월 징역, 1000 달러의 벌금형을 받는다.

노예주인들은 연방 마샬의 인력부족으로 현상금 사냥꾼을 이용하여 노예 한 명당 200달러까지 현상금을 내걸었다.

도주하다 주인에게 붙잡혀 온 노예들은 강간, 성폭행, 채찍질은 물론 불인두로 낙인이 찍히던지 4지를 절단 당하던지 사살이나 교수형, 심한 경우 사나운 개들에게 물려 죽는 린치를 당했다.

이 법은 1864년 6월 28일에 미 상원에 의해 폐지되었고, 미 헌정역사상 가장 수치스러운 악법으로 기록되었다. (다음 호에 계속)

 

 

 

 

donyoo
유동환
99957
63031
2022-10-13
세계 속의 미합중국 대통령(26)-밀라드 필모어(1)

 

 

 

영어이름: Millard Fillmore

출생: 1800년 1월 7일 뉴욕 주 모라비아

사망: 1874년 3월 8일 뉴욕 주 버팔로

부인: 애비게일 파워스, 1836년 결혼

     케럴라인 맥킨토시, 1858년 재혼

특성: 모르쇠당(Know Nothing Party) 창당  

대통령 순위 및 임기연도: 13대, 1850년 7월 9일-1853년 3월 4일

역대 대통령 평가순위: 39/44

소속정당: 반 메이슨당, 위그당, 모르쇠당, 민주당

업적: 페리 원정대를 보내 일본과 통상무역 협정으로 일본개화 및  아시아 진출

인용구; 노예제도는 필요악이다


 

성장과 교육(1800-1825)

밀라드 필모어는 1800년 1월 7일 뉴욕주 핑거 레이크지역 케유가 카운티의 모라비아 통나무집에서 부친 나싸니엘 과 모친 피비 필모어 사이의 8자녀중 2째로 태어났다.
 

가난했던 부친은 가족과 함께 버몬트주에서 케유가로 이주하여 농토를 임대하여 애들 교육은 생각지도 못하고 의복제조업주로부터 돈을 받고 14살의 밀라드를 재단사 견습생으로 팔아 생계를 의지해야 했다.


노예계약이나 다름없는 견습생활을 하면서 주인책을 몰래 빌려본 밀라드는 변호사되는 꿈을 갖게 되었고 30달러를 융자하여 견습비용을 갚고 집으로 돌아와 낮에는 농사일을 저녁엔 도서관책을 빌려와 독학을 게을리 지 않았다.  


1819년 밀라드는 시골학교에서 초등교육부터 시작하여 부친으로부터 인정을 받았고 부친은 자신의 임대주인 월터 우드 판사에게 부탁하여 밀라드는 우드 판사 밑에서 법을 공부할 수 있엇다.


1821년 밀라드는 농촌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쳐 부수입을 올렸고 버팔로에서 법학을 공부하여 1823년 변호사 자격증을 받아 고향으로 돌아와 변호사개업을 하였다.

 

 

결혼(1826)

1819년 농촌학교에서 선생으로 만난 애비게일 파워스는 밀라드보다 두살 위였다.

애비게일은 가난으로 어려움을 겪는 밀라드가 크게 성공할 수 있다고 끊임없는 격려와 용기를 부여했다. 둘은 젊음의 외로움을 달래며 사랑에 빠지게 되었고 1821년 약혼을 하고 결혼은 생활이 안정될 때까지 미루며 결혼 목표를 향해 달렸다.

 

1819년 부친이 이스트 오로라에 농장을 구입하여 생활이 윤택해지고 1823년 밀라드도 변호사업으로 수입이 보장되어 밀라드와 애비게일(1798년 3월 13일생 – 1853년 3월 30일 사망)은 1826년 2월 5일 화촉을 밝히고 곧 아들 밀라드 파워스 필모어와 딸 메어리 애비게일 필모어를 낳고 단란한 가정을 이루었다. 


 

정치입문(1828-1831)

필모어는 부친이 모라비아지역의 치안판사로 재직하는 것을 목격하고 정치에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1828년 필모어는 잭슨의 정책을 반대하는 반 메이슨당에 가입하여1829년부터 1831년까지 알바니 대표 뉴욕주의원직을 겸하면서 버팔로에서 유능한 변호사로 일했다.

그는 채무자들이 채무불이행시 체형 받는 뉴욕 주법을 없애는 법을 상정, 통과시켰다.


 

연방 하의원(1832-1843)

1832년 필모어는 위그당에 전역하여 초선으로 연방 하의원에 당선되었다.

그후 1837년부터 1843년까지 3선 연방 하의원으로 방법 및 수단 위원회 의장을 맡고 1842년 관세를 20%에서 40%로 올렸다.


필모어는 쿠인지 애덤스, 해리슨, 클레이와 정치이념을 같이 하며 노예를 소유하지 않았고 노예제도를 반대했지만 ‘노예제도는 필요악’이라고 미 남북이 극한적으로 대립되는 정세를 판단한 의견을 갖고 있었다.

1842년 위그당은 필모어를 미하원에 재공천 했지만 필모어는 수락하지 않고 버팔로로 돌아와 변호사업을 계속했다.


 

중견정치인(1843-1847)

1844년 쿠인지 애덤스는 필모어를 클레이 대선후보의 러닝 메이트로 부통령 후보공천을 주선했지만 1844년 대선에서 민주당 포크에게 패배 당했다.

1846년 필모어는 버팔로 대학을 공동 설립했고 사망시까지 챈슬러로 지냈다.

 

1847년 필모어는 뉴욕주 감사원에 선출되어 뉴욕 주설립은행이 연방정부의 채권을 사들여 달러의 안정세를 유지하는 공을 세웠다.

 


1848년 대선(1848)

1848년 6월 7일 전당대회에서 위그당은 멕시코전쟁의 영웅이 된 자카리 테일러를 대통령후보에 공천하였다. 노예를 거느리는 테일러는 남부의 표밭을 확신할 수 있었고 노예제도를 반대하는 북부의 표를 잡기 위해 필모어를 부통령 후보에 공천하였다.

그들은 지명을 받고 1848년 대선에 승리하였다. (다음 호에 계속)   

 

 

 

donyoo
유동환
99787
63031
2022-10-06
세계속의 미합중국 대통령(25)-자카리 테일러(4)

 


임기 중 사망한 테일러 대통령 (1849-1850)

 

 대통령 재임(1849-1850)

직업군인으로 평생을 보낸 테일러는 1849년 3월 4일 대통령 취임식에서 행정적 조치보다는 타협으로 미국 정부가 가진 문제 해결을 찾고 워싱턴 초대 대통령의 외교정책에 따라 국제관계에서 중립을 지키는 정책을 강조했다.

 

  테일러는 민주당 정치인들을 배제하고 각 지역에서 골고루 선출된 정치인들로 내각을 편성했다. 유능한 에이브러햄 링컨이나 헨리 클레이 대신 잔 클레이튼을 국무장관으로 선임하여 위그당의 정책과 민주당의 정책을 절충하는 타협장책을 세웠다. 테일러는 1849년 여름 미 북동지역을 순방하는 중 설사 복통으로 9월 일찍 워싱턴으로 돌아왔다.

 

 노예제도 찬반으로 인한 남북 간의 긴장을 해결하기 위해 테일러는 1850년 1월 타협정책을 세워 켈리포니아와 뉴멕시코 지역을 연방 주로 승격시켜 노예제도 선택을 연방법보다 주법으로 해결하게 하였다. 테일러가 개인적으로 300여명의 노예를 소유하여 자기들과  같은 편으로 판단하고 테일러를 지지했던 남부 정치인들은 서부개척주가 노예제도를 금지할 경우 많은 노예들이 주인을 버리고 서부개척주로 도망하여 자유를 얻게 될 것이기 때문에 연방주로부터 분리운동을 재강조하게 되었다.   

 

 1850년 4월 19일 테일러는 대서양과 태평양을 연결하는 운하사업은 양국의 동의하에 이루어지고 양국은 중남미에 군 병력을 동원하지 않는다는 클레이튼-불워트 조약을 맺어 영국이 중남미에 눈독을 들이지 못하게 하였다. 

 

사망(1850)

 1850년 7월 4일 미독립기념일 위싱턴 기념탑 모금 운동 중 얼음 탄 우유에 과일을 먹은 테일러는 며칠 후 심한 구토와 설사를 동반하는 콜레라에 걸려 7월 9일 65세의 나이로 백악관에서 세상을 달리했다. 취임한 지 16개월만이었다. 그는 대통령이 되어 최선을 다했지만 전투경험 없이 전투에 나간 것에 비유하며 그로 인해 죽음을 맞이한다고 유언을 남겼다.

 

7월 23일 장례식을 마치고 켄터키주 루이빌에 자리 잡은 스프링 필드 테일러 농장묘지에 안장되었다.

 평생 남편을 따라 전쟁터를 고향으로 지낸 영부인 마가렛 테일러는 1852년 8월 14일 6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 사랑하는 남편 곁으로 갔다.

 

대통령의 목숨을 앗아간 콜레라(1841-1850)

 1832년부터 1866년까지 세 차례에 걸친 콜레라 역병으로 미국인구 2300만명중 20만명이 사망했다. 대통령들도 예외는 없었다. 윌리엄 해리슨은 1841년 취임 한 달 만에, 제임스 넉스 포크는 1849년 임기를 마친 후 3달 만에 자카리 테일러는 1849년 취임 후 16개월 만에 콜레라로 희생되었다. 

 

  하수도가 설치되지 않아 위생시설이 열약하고 버려진 오물이 음료수에 스며들어 정착인들에게는 설사병이 예사였다. 

백악관 실내 목욕탕은1853년이 지나서야  설치되었고 서민들은 1년에 서너 번 목욕했다. 냄새가 지독한 비누는 빨래용으로만 사용되었고 보통 얇은 흰색의 속옷을 갈아입어 몸의 때를 닦아냈다. 더운물이 귀해 목욕통에 더운물을 넣고 조부모부터 시작해서 나이 순서대로 목욕하면 어린 아기가 마지막 차례가 된다. 같은 목욕물을 나이에 의해 면역성이 약한 노인부터 시작하여  목욕하는 습관이었다고 할 수 있다.  

 

 중세부터 내려온 독일 속담을 이전한 독일계 이민자들은 미 정착지에서 더러워진 목욕물을 버릴 때 먼저 아기를 목욕물에서  꺼내라고 표현한다.  영어로 “ DON”T THROW THE BABY OUT WITH BATHWATER.”  이 속담은 생활영어가 되어 불필요한 물건을 버릴 때 귀중품을 먼저 고르라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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